일년에 한 번 하는 고등학교 대동창회는 늘 설을 전후해서 열린다. 한가로운 겨울을 즐기기 위함인지 한국의 명절을 기념하기 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년 같은 때에 모인다.
남편의 동창회이니까 늘 파트너로, 방관자로 참석해서 구수한 사투리에 재미있는 농담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즐기곤 한다. 올 동창회 가는 날은 단비가 바삭거리며 누렇던 잔디를 파랗게 적시고 있었고, 늦은 저녁인데도 식당이 떠나가게 한참 웃고 떠드는 동문들의 마음은 대낮처럼 밝아오는 듯 했다.
학창시절 까만머리 짧게 짜르고 후배가 선배에게 깍듯이 경례하며 규율을 지키듯이 이 날도 앉는 자리부터 회기 순으로 앉아 선배를 존경하고 후배를 배려하는 선후배간의 사랑이 눈물겹게 느껴졌다. 고참 선배가 먼저 인사말을 하고 덕담을 나눈 후 회기별로 차례로 내려오면서 한 마디씩 이야기하는 사이에 삼십여년의 갭이 자연스레 메꾸어지고 있었다.
사십여명쯤 되는 참석자들중 일을 하는 사람도 제법 많고 은퇴해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은퇴한 사람들의 공통 주제는 단연 건강이다.
어둠을 물리친 태양처럼 뜨거운 열정을 가슴에 품고 내일의 꿈을 향해 전진하면서 청장년시기를 지나 멀리 미국땅에서 그것도 워싱턴지역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인연이다. 남편의 동기들은 지나온 삶의 흔적으로 겉모습은 대머리에 희끗거리거나 백발이 되었지만, 이 시간만큼은 희미했던 눈동자가 반짝이는 날이다.
구덕산 기슭을 오르내리며 원형교사와 교정에서 운동하고 게임하며 바둑도 두고 때로는 정치와 사회를 논하며 싸우고 웃고 공부하다가 헤어져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 왔던 삶의 추억이 되살아나는지 마냥 떠들고 즐거워한다.
은퇴한 동창들은 지금이 제일 평안하고 좋은 시기라고 말한다. 자식으로 부터 독립되고 재산이나 명예, 직위등 경쟁에서 자유로와지고 서두를 필요없이 느긋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길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한다.
몸이 불편해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 선교활동으로 믿음에 충실한 사람, 일하면서 못했던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 시간이 없어 못치던 골프를 원없이 치는사람, 세계 곳곳을 다니며 사진도 찍고 여행을 하며 즐기는 사람 등 취미가 다르고 생활패턴이 달라도 모두 인생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것 같다.
해마다 하나 둘씩 저 세상으로 영원한 이별을 하는 슬픔을 겪으며 동문의 숫자가 줄기도 하지만, 한국 혹은 타주에서 오는 동문들이 있어서 환영하며 그 슬픔을 달래고 동창회는 이어간다. 단지 명문고교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 몇십년이 흐른 후 추첨으로 들어온 학생들은 자신들이 함께 모이는 걸 꺼려한다는게 아쉽다.
시대적인 에피스테메(episteme) 라 할까? 이젠 추첨시대가 되어 어려운 시험을 쳐서 동문이 되는게 정상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을까.
인생 육십이면 학력, 인물, 나이 등 모든게 평준화 된다고 한다. 미로를 헤매며 저마다의 길을 찾아가는 삶 속에서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지만 실제 가까이 들여다 보면 인생은 대개 비슷비슷하다. 그 날 어떤 후배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생각을 바꾸면 말이 바뀌고 그 말에서 행동이 바뀌며 그 행동에서 습관이 바뀌게 되고 그 습관이 성격을 만들고 그 성격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어느 글에서 읽었다 한다.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고 밝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까? 다정한 미소, 손길, 마음에 담긴 한 마디를 서로 나누며 행복을 듬뿍 담고 온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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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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