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가슴 벅찬 감동이, 때론 말 못할 슬픔과 절망, 고단함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특히 낯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 한인들에게는 결이 다른 스토리들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내장돼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속, 이제는 잔잔한 강물처럼 침잠됐을 워싱턴 지역 한인들의 초기 이민생활의 애환과 남다른 사연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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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전 처음 이곳 워싱턴에 왔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한국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야말로 우리는 완전 이방인 이었다. “너희가 어느 나라에서 왔다고? 코리아? 그 나라가 어디에 있다고?” 그때만 해도 한국이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우리를 본 많은 미국사람들이 ‘코리아’를 처음 들어본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어도 서툰 우리가 단어 몇 개로 한국을 설명 하기는 역부족 이었다. 어쩌다 동양인을 본 적이 없는 외진 시골에 가면 그 동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기도 했다.
당시 버지니아 남쪽에 있는 한 학교에서 공부하던 한 한인학생은 한국말이 오죽 하고 싶었으면, 혼자 화장실에 가서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고 났더니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더라고 했다.
그때는 또 주머니가 가벼웠던 학생들이 헌차를 샀는데 그 헌차도 부러워 한번 태워 달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도 대부분의 한인들은 어린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한 푼이라도 아껴서 낯선 이국땅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게 자식들 교육에만 전념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한국에서 올림픽도 열리고 경제, 문화도 많이 발전해서 이제는 아프리카에 사는 아이들까지 ‘코리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 격세지감이다.
태평양 건너 멀리 살아도 월드컵 4강에 들어갔다고 빨간 셔츠를 입고 함께 응원했고 김연아가 우승하면 눈물을 흘리며 가슴 벅차 했다. 이것이 바로 애국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가 ‘약사 부부’로 잘 생활한 후 은퇴할 수 있었음도 단지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의지가 돼 주고 따뜻한 정(情)의 울타리가 되어 준 우리 이웃, 친구들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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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란 / 실버스프링,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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