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그랬던가? 얼굴 모습에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얼굴의 잘 생기고 못생기고의 문제가 아니다. 얼굴 윤곽 모습이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겠으나 얼굴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정원사가 자신의 정원을 가꾸듯이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가 있겠다.
살면서 삶이 평탄할 수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며 알게 모르게 수많은 시련, 극복 후의 어느 정도의 환희와 평정, 마치 용광로에서 철이 달구어져 훌륭한 철제품들이 탄생하듯 우리들의 얼굴 모습도 이렇게 해서 나타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근래 코로나 19, 변종 코로나의 등장으로 더욱 조심해야 되는 집콕생활의 장기화와 내적 심사의 뒤틀림으로 거울을 보기 민망할 정도로 거울에 비쳐진 모습이 영, 아니올시다 였다. 이런 모습이 그대로 지속될까 은근히 겁도 났다. 아니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너, 무슨 큰 병 있는 거 아냐?”라고 단방에 물어볼 것 같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차, 꼭 1년 만에 산악회 겨울 설산 등반에 참가해 내가 늘 말하던 “백만불짜리 맑은 공기”를 서너 시간 맘껏 마시고 온 후 거울을 봤을 때 정말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로 내 모습은 변해 있었다. 침울했었던, 흉물스럽기조차 했었던 나의 모습이 너무도 편해 보이고 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가. 고난이 밑도 끝도 없이 무한정 계속된다면 살아남을 자가 몇 명이나 될까? 그 곱던 여인네들의 얼굴도 삶의 찌든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무너지면 아니 된다. 어느 누구에게나 고난은 닥친다. 어떻게 슬기롭게 이겨내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이럴 때, ‘쉼’이란 말이 가장 적절한 언어인 것 같다. 한 박자 쉬면서 명상이라든가, 걷기라든가, 너무도 삶에 지쳐 미쳐 잊었던, 평소 자신이 좋아했던 그 무언가를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의 중압감을 완전히 털어내지는 못해도 좀 경감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육체적 병도 오래 내버려두면 치료가 어려워지듯 힘든 생활에서 오는 정신적 중압감도 마찬가지이므로 너무 오래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수시로, 그 중압의 노예에서 벗어나려는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겠다.
화가들의 자화상들을 감상하며 그림 그릴 그 당시 그들의 심리상태를 한번 상상해본다. 참고로 자화상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는 반 고흐다. 40여점의 작품 중 1889작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1887년 작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이 대표작이 아닐는지. 그 다음이 렘브란트라고 한다.
<문성길 / 의사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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