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하면 흔한 이미지는 흰가운 입고 햇빛도 잘 안드는 실험실에 틀어박혀 시험관을 들여다보며 뭔가 액체들을 섞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허구에서는 사회성이나 말재주 따위는 없고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로 과장되어 많이 그려진다. 그런데 과학은 협업과 전문적인 의사소통이 일상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실제로 과학을 잘 하려면 사회성도 적당히 좋아야 하고 글도 잘 써야 하고 발표도 잘해야 한다.
수년 전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전세계에서 천명 넘게 모이는 우리 분야에서 제일 큰 학회에 분과별이 아닌 전체 참석 세션에서 15분간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발표 울렁증으로 고생하던 나에게 지도교수님의 조언은 어차피 네 연구에 대해 너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 자신감을 가져라, 그래도 너무 떨리면 “그냥 안경을 벗고 해라” 였다. 탁월한 조언이었다. 슬라이드마다 말해야 할 내용은 이미 다 외운 상태에서 나는 두려워하는 대상인 강당 저편 청중들의 눈은 물론 얼굴 윤곽도 잘 보이지 않는 뿌연 허공 속에서 안도하며 별로 떨 것도 없이 발표를 잘 마쳤다.
얼마 전에 지역 우수 고등학생 수십명에게 한시간 동안 내 연구에 대해 소개하는 온라인 강연을 하게 되었다. 시작 전 내가 사용할 전문용어에 대한 사전지식을 알아보기 위해 실시간 설문조사도 간단히 하고,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짧은 비디오들도 넣고 나름 흥미롭게 준비했었다. 아이들 모두가 자기 카메라를 끄고 듣고 질문은 채팅으로만 받아서 담당자가 읽었는데, 나는 실체가 모호한 가상의 청중을 향해 오히려 묘한 자신감을 느끼며 진행했고 기대보다 좋은 반응을 얻었다.
팬데믹 동안 화면 공유가 위주인 온라인 발표 형식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청중이 내 눈에 보이지 않고 일일이 눈맞춤을 하지 않아도 되어 한결 마음이 편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새삼 발표에서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생각한다. 청중과 눈이 마주치는 찰나, 저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할까, 나의 상상력이 실시간으로 발동되면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닐까 싶다. 말하면서도 순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아직도 잘 모르거나 준비가 미흡했다고 느끼는 부분을 방금 눈이 마주친 그에게 부여하여 상상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슬슬 대면 발표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 내게 있어 발표 두려움이란 참 쓸데없는 사고활동의 산물이라는 걸 깨닫는다.
<장희은(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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