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러시아 출장을 마치고 자투리 시간이 생겨 제일 유명하다는 서커스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빌딩 몇 층은 거뜬히 날아서 다닐 것 같은 단원부터, 태어나 처음 보는 호랑이와 곰의 합동 서커스까지 화려하지 않은 순간을 찾는 것이 빠를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정작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있는 건 서커스 단원들이 다음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 광대 한 명이 무대로 올라와 홀로 관객들과 마주했던 짧은 시간이다.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핀 조명을 받은 채 공연 중간에 나타나 약 오 분 간 관객들을 마주하는 그의 얼굴을 함께 상상해 보길. 상투적으로 하얗게 칠한 얼굴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 크기가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검은 구두와 어울리지 않는 회색빛 곱슬머리. 그가 불뚝한 배를 풍선처럼 부풀리며 마이크 넘어 입을 열면 몇백 명이 앉아있는 큰 무대가 가득 채워지는 웅장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 그가 무대를 휙 하고 휘젓기만 해도 관객들은 깔깔거렸다. 그가 객석을 눈으로 뒤적거리며 몇몇 사람들에게 농담을 던질 때는, 모두가 ‘저를 뽑아주세요!’라는 눈빛으로 그의 관심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렇게 운 좋은 관객 중 최고의 한 사람은 무대로 내려와 그와 즉석 공연까지 함께 했다.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다 보면 어느새 다음 무대의 시작이었고, 관객들은 그의 퇴장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심심한 공기를 구겨버리고 꺼질 것 같은 불씨를 훅 불어 살려내듯, 재미있는 공연 후에는 그보다 더 유쾌한 만남이 있었다. 내려앉은 온도를 다시 살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을 관객들은 그의 마지막 퇴장에 슈퍼히어로에 가까울 정도의 환호와 기립 박수를 보냈다.
무대가 화려할수록, 어쩔 수 없이 더 고요한 끝을 맺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며 얼마나 대단한 무대를 펼쳤든, 끝이 나면 아무도 없는 고요한 무대에서 갑자기 밀려오는 허탈함과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을 끝까지 버티지 못해 가버릴 때도 있고, 서커스에서 만난 고마운 슈퍼히어로처럼 누군가가 그사이를 잘 메꿔줄 때도 있다. 아니지, 오히려 내가 그 슈퍼히어로가 되어 누군가의 무대 사이를 심심치 않게 이어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든, 참 중요한 역할이 아닐 수 없다.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