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도에 남편이 직장에서 파견을 받아 홍콩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어느날 카세트 테이프로 한국 가곡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다.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특별히 외로웠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울었던 경험이 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 헛갈릴 때도 있다.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를 바로 몇 시간 후에 여기 앉아서 보는가 하면, 뉴스도 실시간으로,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도 유튜브를 통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카톡이라는 게 생겨서 온갖 카톡방을 통해 학교 졸업한 후로 한 번도 만난 적도, 생각조차 해본 적도 없는 동창들과 얘기를 나눌 수도 있게 됐으니… 세상이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느낌도 든다. 더구나 최근에는 줌(Zoom)이라는 게 생겨 여러 명이 모여 얘기를 주고받는다. 다들 나이가 들었다보니, 그 시간의 반 이상은 ‘너 소리 안 들려’ 등, 어찌 보면 쓸데없는 얘기들로 채워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서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험을 했다는 충족감과, 그래도 아직도 내가 이 정도는 하며 산다는 뿌듯함에 얼굴들이 환해져서 다음달을 기약하곤 한다.
몇 십 년만에 보게 되는 얼굴들도 있으니, 누군가를 우선 체크 한 후에, 서로 ‘너는 어쩜 그렇게 옛날 그대로냐’는 등의 말을 한다. 이 말을 들은 딸이 집에 가서 묻더란다. ‘엄마, 저 아줌마 고등학교 때도 저렇게 늙었었어?’ 온통 백발이 되었음에도 우리 서로 보기에는 아직도 갈래머리 땋았던 고등학교 시절 친구 얼굴로 보이는 데에야 어쩌겠는가.
우리 친정어머니는 말년에 다리를 못 쓰셔서 앉아서 생활을 하셨다. 그래도 워낙에 명랑하셨던 분인지라 항상 웃으시며, 재미있게 보는 연속극 얘기도 하시곤 했다. “얘, 연속극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면서 따라 하하 웃다 보면, 구십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겨.” 그러나 아쉽게도 그 꿈은 못 이루시고 여든일곱 살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 더 좋은 세상을 못 보시고…아, 좋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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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씨는 국문과를 나와 국어교사, 시카고 지역 한국학교 교사 경험을 갖고 있다. 인생의 반은 회사원의 아내로, 나머지 반은 목회자의 아내로 살아왔다. 지금은 은퇴해서 세 손녀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자칭 ‘문학 할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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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전 살렘 한국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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