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없으면 시간은 어디에 기억될까. 세월을 따라 사람이 늙어 가듯이, 모든 것을 잡아먹는 시간 속에 공간도 퇴화하고 소멸된다. 그러한 시간 앞에서 도시는 속수무책으로 변하지만 시간의 흔적이 기억되고 역사가 될 때, 어떤 공간은 그 이름 자체로 한 시대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학림다방은 서울 사대문 안동네 낭만 구역, 대학로 역사의 산 증인이자 살아있는 문화사이다. 우리나라 카페 문화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학림은 70-80년대 젊은이들의 근거지이자 문화의 산실이었다. 책을 읽거나 생각을 정리하던 당신의 단골 다점이고, 음악, 미술, 연극,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담론을 펼치던 사랑방이자, 격동의 시간 속에 새 시대의 전망이 모색되던 소통의 공간이었다.
변혁의 시대, 고난과 희열로 점철된 대학로의 역사에는 민주화 시기의 저항 문화운동과 대학문화가 공존한다. 학림의 여신이었던 전혜린으로부터 이청준, 김지하, 황지우, 김민기, 김광림 등 한국 문학사의 걸출한 문인과 예인들의 전사와 신화가 탄생하고, 1980년대 광주 사태로 얼룩진 학림 사건의 그림자가 있다.
창 밖의 어린 플라타너스가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라도록 그 자리를 지키는 학림은 우리의 옛사랑이 머물렀던 곳이다. 이 좁고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은 얼마나 많은 청춘의 인생사를 기억하고 있을까. 커피 한 모금에 추위를 녹일 수 있었던 푸른 꿈의 공간에서 추억을 소환하는 근대 유산은, 진한 커피에 생크림을 소복히 얹은 비엔나 커피이다. 들창문과 작은 나무 탁자, 계산대 뒤편으로 빼곡히 들어찬 엘피 음반과 클래식 음악이 커피향과 함께 흐르는 곳, 청춘을 지나 중년이 되어 들렀던 학림은 시간의 파도 속에서도 그렇게 옛냄새가 스며 있었다.
2001년 학림을 찾은 시인 김지하는, “학림시절은 내게 잃어버린 사랑과 실패한 혁명의 쓰라린 후유증, 그러나 로망스였다”고 회고했다. 지성과 예술의 사랑이 되고 아픔이 되었던 장소, 학림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한 시대에 대한 기록이자 우리 모두의 추억이 깃든 옛자리이다.
친애하는 도시여, 그대는 기억하는가. 마로니에 잎이 지나는 그 길, 때묻지 않은 고민과 그 환한 웃음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우리의 노래를, 5월의 만개한 꽃잎처럼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던 우리의 젊은 날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욕망의 세속에서도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있다. 학림의 노스탤지어, 응답하라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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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은(SF 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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