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오랫만에 그리운 고향 대전 방문길에 올랐다. 젊었을 때는 고향에 가려면 가슴이 울렁거렸는데 이제는 가슴이 무디어졌는지, 타향이 고향이 되어서인지 무덤덤하다.
우리는 누구나 그리운 고향이 있다. 고향 이야기는 낭만의 그 자체 상상의 세계로 가는 비밀 통로와도 같다. 타관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가슴 한쪽에서 아지랑이 처럼 피어 오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고국, 노인 세대는 급변하는 인터넷 시스템을 따라 가기가 무척 어렵다. 특히 식당 및 커피숍에서 주문을 본인 자신이 직접 해야 하는 곳에서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종업원의 도움을 받아야 만 했다. 깨끗한 지하철과 시내버스는 65세 이상은 무료로 운행하고, 전철 내부에는 노약자 자리가 특별히 지정되어 있다.
이번 고향 방문은 나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구입한 옥천에 있는 산에 30여 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를 모셨다. 미국에 살고 있는 관계로 제대로 관리를 못하고 있어서 파묘 한후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모실까 해서이다. 나 편하자고 어머니가 살아 생전 마련한 선산에 묻힌 부모님을 꼭 파묘/화장해서 납골당에 모셔야 하나라는 마음의 갈등은 뉴왁 공항을 떠나면서부터 줄곧 나를 괴롭혔다.
우리 가문 장조카와 같이 꼬불 꼬불 산길을 올라 부모님 산소를 보니 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에 죄송한 마음이 가슴속을 짓 누른다. 납골당에 모실까 했던 마음이 초라한 산소를 본 순간 사라지고 부모님에게 잠시라도 불효였다는 마음이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화장은 안돼요” 라고 강렬히 반대 하는 조카와 같이 산소 주위에 무성한 잡목 200여 그루를 베어 내고 정리를 했더니 앞이 훤히 확 트여 시원하게 멀리까지 보인다.
이곳에 오래 오래 모시고져 옥천에 있는 경주석재에 비석을 주문했다. 길 날이라고 정한 날,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날 아버지 어머니 이름자 밑에 자손들의 이름을 넣은 비석을 조카들과 같이 경주석재의 도움으로 산소 옆에 세워 드렸다. 경주석재에서 산 일을 많이 한다는 강씨가 비석을 세우고 하는 말이 “여기는 명당입니다”라는 말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마도 부모님이 지하에서 비석을 보고 무척이나 기뻐 하실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 마음 놓고 이곳에서 오래 오래 편히 쉬세요,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찾아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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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육/뉴저지 팰팍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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