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한 백인청년이 흑인교회에 들어가 성경공부 중이던 목사와 교인들에게 총기를 난사해 9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곳곳에서 인종차별의 상징인 남부연합기와 기념물의 퇴출운동이 시작되었다,
2017년 버지니아주 샬로츠빌 시가 로버트 리 장군 동상의 철거계획을 발표하자 극우파 백인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며 횃불과 나치깃발, 남부연합기를 들고 쏟아져 나왔다. 이때 한 남성이 반대시위대를 향해 차를 돌진해 32세 여성이 숨지고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2020년 여름 미니애폴리스에서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경찰에 의해 질식사한 사건이 “흑인생명도 소중하다”(BLM) 운동의 도화선이 된 일은 모두가 아는 바다. 이외에도 여러 건의 흑백 충돌이 있었지만 크게는 이 3개 사건에 의해 지난 10년 동안 미 전국에서 200개 이상의 남부 동상과 기념물이 파괴되거나 훼손되거나 무너졌다.(아직도 700여 개가 남아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한 예술인이 쓰러진 조각상들을 모아 전시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LA의 비영리예술단체 ‘더 브릭’(The Brick)의 관장 함자 워커(Hamza Walker)는 철거동상을 보관하고 있는 도시들에게 전시대여 요청서를 보내기 시작했고, 2017년부터 8년에 걸쳐 10개의 기념물을 모았다.
여기에 현대미술관 모카(MOCA)의 베넷 심슨 수석큐레이터와 유명작가 카라 워커(Kara Walker)가 합류해 마침내 대단히 특별한 전시를 만들었다. 지난 23일 LA다운타운의 모카 게픈(Geffen Contemporary)과 ‘더 브릭’에서 동시에 개막된 ‘모뉴먼츠’(MONUMENTS)가 그것으로, 철거된 구시대의 동상들을 현대작가 18명의 회화, 조각, 사진, 비디오, 영상작품들과 함께 볼 수 있다.
이미지가 거대하고, 메시지가 강렬한 전시다. 15피트에 달하는 거대한 동상들은 그 자체로 위압적이다. 과거 높은 기단위에 설치되어 ‘우러러’ 봐야만했던 백인 ‘영웅’들을 가까이 눈높이에서 마주하는 경험은 기묘하고 특이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로버트 E. 리 장군의 동상을 받쳤던 돌 기단들이 낙서투성이가 되어 흩어져있다. 오른쪽에는 그 동상을 녹여 만든 수십개의 금괴들이 층층이 쌓여있다. 이뤄지지 않은 흑인 배상의 상징으로 보인다. 바로 이 동상의 철거계획이 샬로츠빌 시위의 유혈사태로 번졌는데 결국엔 용광로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가장 오래된 동상은 로저 B 테이니의 것으로, 그는 1857년 악명 높은 드레드 스콧 사건에서 “노예는 결코 시민이 될 수 없으므로 사유재산”이라고 판결했던 대법원장이다. 1898년 윌밍턴 학살사건을 조장한 신문사 사장 조세퍼스 대니얼스의 동상도 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300명의 흑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유일한 여성 조각가 로라 가딘 프레이저의 두 장군상은 압도적 위용을 자랑한다. 바로 로버트 리 장군과 스톤월 잭슨 장군이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거대한 기마상이다.
남부연맹의 유일한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조각상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 직후 온몸에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 끌어내려진 모습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전시돼있으며, 극우여성단체 ‘남부연합의 딸들’(United Daughters of the Confederacy)’의 후원으로 제작된 ‘피에타’를 연상시키는 동상들은 그 형체만큼이나 메시지도 유치하다.
이에 비해 현대작가들의 작품은 소재와 표현과 개념이 훨씬 다양하고,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걸작은 ‘더 브릭스’에 전시된 카라 워커의 ‘무인 드론’(Unmanned Drone)이다. 한인타운 가까이 웨스턴 길(518 N. Western Ave.)에 있는 이 갤러리는 전시장 중앙에 이 작품 하나만을 설치했을 정도로 그 강렬하고 파워풀한 존재감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흑인작가 카라 워커(55)는 참혹한 인종차별의 이미지를 동화적 실루엣으로 형상화한 작업으로 유명하지만, 대규모 조각에서도 탁월한 힘과 통찰력을 보여준다.
5톤이나 되는 스톤월 잭슨의 청동 기마상을 플라스마 절단기로 잘라내 해체한 후 사람과 말의 팔, 다리, 머리, 엉덩이를 무질서하게 뒤섞어 용접함으로써 완전히 변형된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거대한 괴물, 반인반마의 청동상으로 재조립된 ‘무인 드론’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모순적 역사와 결속을 동시에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내년 5월3일까지 계속되는 ‘모뉴먼츠’는 1619년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서 최초의 흑인노예 거래가 이루어진 이후 미국역사의 뻔뻔한 민낯을 담은 전시다. 전시는 원래 2년전 열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만일 바이든 행정부 시절에 열렸다면 지금과는 크게 다른 의미와 반향을 남겼을 것이다.
트럼프와 마가의 백인우월주의가 되살아나고 있는 시점에서 ‘모뉴먼츠’는 무너진 역사에 경종을 울리는 한편, 현대의 예술가들이 분열된 미국에 보내는 사려 깊고 시적인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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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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