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주의 겨울은 길고 습한 무채색의 터널 같다. 그 끝에서 만나는 봄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넘어, 대지가 밀어 올리는 경이로운 생명력의 현현이다. 며칠 전, 우리 집 마당 젖은 흙 위로 작은 기적이 고개를 내밀었다.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어 죽었나 싶어 잊고 지냈던 크로커스였다. 가느다란 잎새 중앙에 선명하게 그어진 하얀 선 하나. 그것은 대지가 이제 막 써 내려가기 시작한 첫 문장의 밑줄 같았다.
이 작은 보랏빛 꽃이 품은 역사는 마당의 깊이보다 훨씬 아득하다. 크로커스라는 이름 뒤에는 인류사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아온 향료, 사프란(Saffron)의 신화가 숨 쉰다. 기원전 1600년경 그리스 산토리니섬 아크로티리 유적의 벽화에는 여인들이 정성스레 크로커스 암술을 채취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태양의 축복을 받은 섬에서 피어난 보랏빛 꽃들은 고귀한 ‘붉은 금’이 되어 왕실의 향기로, 신을 향한 제물로, 때로는 클레오파트라의 욕조를 물들이는 우아한 선율이 되었다.
이국의 뜨락에서 만난 보랏빛 설렘은 문득 고국 산천의 봄을 환기시킨다. 한국의 산야에도 치열하게 보랏빛을 밀어 올리는 이들이 있다. 잔설을 뚫고 고개를 내미는 얼레지의 고고한 자태나, 굽은 허리로 뜨거운 보랏빛 숨결을 토해내던 할미꽃이 그것이다. 서구의 크로커스가 신화적 화려함을 품었다면, 우리 산천의 보랏빛은 인고와 자애를 닮았다. 대륙의 끝과 끝, 서로 다른 토양에서 피어났음에도 메시지는 같다. 차가운 땅속을 견뎌낸 존재만이 선명한 영혼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다는 준엄한 진리 말이다.
수천 년 전의 지중해 햇살과 고국 산천의 숨결이 시공간을 건너 여기 워싱턴주의 마당에 가닿았다는 사실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흙 속에 봉인되었던 긴 잠이 깨어나는 곳, 겨울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곳으로 ‘너’는 다시 왔다. 잭 마리나이의 시 구절처럼, 강물이 시에 잔물결 치고 펜이 생각하기 시작하는 그 지점에 이 꽃이 피어난 것이다.
꽃은 단순히 예뻐서가 아니라, 버텨내었기에 아름답다. 영하의 추위와 축축한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묵언 수행의 시간 속에 가두었다가, 때가 되면 정확히 그 자리를 뚫고 올라오는 단호함. 시인에게 꽃은 식물이 아니라 땅이 길어 올린 가장 정직한 시어(詩語)다. 사프란의 붉은 암술이 팽팽한 문장의 종지부가 되는 순간, 우리네 삶의 해묵은 슬픔도 한 줄의 아름다운 서사로 치환된다.
새봄이 온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계절의 발자국이 다시 찾아와, 우리 안의 메마른 뜨락이 향기의 성소로 변하는 과정이다. 낯선 타국 땅에 뿌리를 내리며 겪는 이민 생활의 고단함도, 실은 저 크로커스처럼 어두운 땅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과정이리라. 꽃이 피지 않는다고 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더 깊은 향기를 얻기 위해 침묵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나는 마당의 보랏빛 꽃잎 위에 새로운 이름을 새긴다. 수천 년을 풍화되지 않고 타오른 신화처럼, 올봄 우리들의 문장들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보랏빛 위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동토를 뚫고 올라온 저 당당한 꽃의 선언 앞에, 비로소 겸허한 마음으로 봄의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간다.
“너는 온다, 오랜 침묵을 깨고 내 뜨락의 첫 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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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서북미문인협회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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