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집에서 마신 물인데 삼키는 걸 깜빡했어요” 잘 있었냐는 그분의 인사를 받고서야 입안 가득 체온만큼 뜨듯해진 물을 황급히 삼켰다.
젊은 사람이 웬 건망증이냐는 책망 대신 그분은 내 무심함을 언짢아하신다. “그럼 집에서 여기까지 운전해 오는 동안 옆 사람과는 한 마디도 안 했다는 거야?” 불행히도 그 날 내 옆에 앉았던 사람은 딸아이였고 나는 미안한 마음에 아이를 보고 한번씩 웃어 주었다.
말수 없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와 사는 언니는 형부의 그 과묵함에 때로 진저리를 쳤다. 참다 못한 언니가 “쓸데없는 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든 좀 해봐요.” 다그치기도 여러 번, 그러나 형부의 대답은 이십여년 언제나 똑같았다. “내 입은 진실만 말하는 입!”
확실히 침묵은 금이다. 그러나 솔직하되 알맞게 절제된 또 친근하되 무례하지 않은 말은 다이아몬드다. 사실 눈치 없이 과묵하기만 한 것도 때론 실례가 된다. 남은 속옷까지도 벗어 보이는데 자신은 외투조차 벗지 않겠다는 이기심의 표현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의 과학자들은 미래에는 생체학적 인간이 창조되어 언어 없이도 서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예견한다. 그러나 형부라면 몰라도 내겐 훗날 캡슐로 세끼 식사를 대신하게 될 거라는 예상만큼이나 삭막하고 허전하다. 사실 인간에게 맛난 음식만큼이나 포기하기 힘든 것이 있다면 표현의 욕구일 게다. 인간의 언어란 단순히 의사소통의 기호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힘들게 느껴지는 건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의 문제다. 우선 내 속에만 담아둘 것이냐, 드러내어 알릴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어려운 건 전하고자하는 뜻을 과연 어떤 톤으로,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선택이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70%를 웃도는 한국기혼여성들의 대답은 ‘천만예요’다. 그런데 남편이 싫은 그 많은 이유 중 아내들이 첫손가락으로 꼽는 것은 남편의 무례한 말씨란다. 반면 그녀들이 가장 소망하는 남편의 덕목은 흔히 남자들이 예상하듯 사나이다움도 경제력도 혹은 높은 사회적 지위도 아니다. 아내의 인격을 존중하는 다정하고 교양 있는 말씨라는 것이다.
“1년 사시장철 나는 늦봄이고 당신은 봄길이니 언제 여름이 되고 언제 가을이 되죠?... 우리의 봄은 가시지 않을런가 보오”고 문익환 목사가 일생 같은 길을 걸었던 동지며 아내인 박용길님에게 보낸 옥중서신이다. 가족과, 민족 그리고 나라를 사랑했던 늦봄, 그는 자신의 가슴에 넘치는 사랑을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해낼 줄도 아는 멋쟁이였다.
말이란 또한 개인의 표현욕구를 충족시키는 예술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한 집단의 공동정서, 즉 문화를 담는 그릇이기도 하다. 아니 자체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독립된 문화다. 그래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도 쉽게 끈끈한 ‘우리’가 되는 게 아닌지.
부족한 글을 실으면서 곧잘 부끄럼에 잠기는 요즘, 내겐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에 더하여 ‘왜’ 말을 하는가의 고민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나는 정말 왜 이 칼럼을 쓰는가?
대답은 ‘나눔’이다. 결국 말을 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이웃과의 ‘나눔’을 위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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