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대 미해군복무, 광복에도 일익”
상해서 출생, 김구 선생 총애
미정보부대 근무후
76년부터 법정통역관 생활도
LA수피리어 법원에서 20여년을 한국어 통역관으로 일했던 제인 임(79·한국명 윤미) 여사는 김구 선생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초창기 이민자다.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한 부모를 따라 상하이에서 출생한 임 여사는 어린 시절 “나라를 사랑해야 된다”고 당부하시던 김구 선생의 단호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인 부친 임학준 선생은 일제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 영국인들이 운영했던 상하이 전력회사에서 전기 기술자로 30년 동안 근무하며 수퍼바이저까지 지냈다. 부친이 상해 임시정부 이시영 부통령과 조소앙 국무위원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 여사의 집을 안방 드나들 듯 했다고 한다. 임 여사는 “어머니의 음식솜씨가 좋아 홀아비 생활을 했던 어른들의 방문이 끈이지 않았다”며 “김구 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항상 ‘이 다 큰 아가씨야!’라고 불렀다”고 회상했다.
임정 요인들의 방문이 잦아지면서 김구 선생과 임 여사 일가의 인연도 깊어졌다. 결국 임 여사의 여동생 윤연씨와 김구 선생의 막내아들 김신(현 백범기념사업회장)씨는 어른들의 뜻에 따라 백년가약을 올렸다.
김구 선생은 임 여사에게 良心建國(양심건국)이라는 휘호를 직접 써 줬고, 그녀는 아직도 이 것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상하이 국제 여고를 졸업한 임 여사는 미 해군에서 잠시 근무한 뒤 1948년 가족과 함께 조국에 돌아왔다. 당시 이승만 정부의 정책 수립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군 자문단은 영어를 잘하는 임 여사를 인적자원 연구팀에 합류시켰다. 그녀는 2년여 동안 미국 학자들과 함께 ‘한국의 삶의 질 향상 방안’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중국어까지 3개 국어에 능통한 그녀는 1951년부터 5년 동안 일본에 있는 미 공군 정보부대에서 중국과 북한의 간행물을 분석, 번역한 뒤 펜타곤에 이를 보고하는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
임 여사는 이 곳에서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오렌지카운티에 정착했다. 30∼40대에는 성인학교와 YWCA에서 활발한 사회봉사 활동을 펼친 임 여사는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동포들에게 봉사해보자”는 생각에 법정 통역관일을 자청했다고 한다.
1976년 53세의 나이에 시작한 통역관 일은 1994년까지 19년 동안 계속됐다.
임 여사는 “대량 이민 초기 돈벌이에 바빴던 부모들이 자녀를 제대로 돌 볼 시간이 없어 잘못된 길로 나가는 학생들이 많았다”며 “법정에 불려온 자식의 선처를 호소하던 부모들을 볼 때 제일 안타까웠다”고 회상했다.
임 여사는 하버 시티의 자택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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