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에 둘째 아들이 친구들과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립 커런트(rip-current)에 휘말려서 익사 직전에 간신히 구조되어 병원 신세를 진 일이 일어났다. 얼마 후 그 때의 병원비, 의사비, 엠뷸란스 사용비 등등의 청구서가 줄줄이 날아들었다. 의사의 비용 청구서를 살펴보니 보험 회사에 클레임을 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나는 의사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통화 중이라 기다리는 동안 얼핏 “환자가 성인이면 본인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의료 기록이나 진료 내용 등을 말해줄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이 들렸다. 아차, 아들이 이제 19살이니 성인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저쪽에 서비스 직원이 나왔다. “자수하는 게 낫지 하는 생각으로, “19살 난 환자의 어머니인데, 본인이 아닌 내가 당신과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라고 물었다.
직원은 “나는 당신으로부터 보험 관계의 정보(information)를 받을 수 있지만 그 것이 전부 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보험 회사의 이름, 전화 번호, 주소만을 주고 전화를 끊었다.
금년에 여러번 의사와 병원에 갈 일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생활 보호법 내용을 읽고 서명을 해달라는 바람에 짜증이 났던 생각이 났다. 만일 타인에게 내 의료 기록 등을 볼 수 있고 사용할 수 있게 하려면 본인이 릴리즈 폼에 그 사람의 이름을 적고 서명을 해야만 한다.
병원과 의사 사무실에서는 보험을 청구할 때 환자의 의료 관련 기록을 첨부해야 하므로 환자로부터 릴리즈 폼에 서명을 받아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 폼은 일정 기간 후에는 효력을 상실하게 되므로 환자는 다시 릴리즈에 서명해야 한다.
<프라이버시 법>은 정보화 사회의 도래와 함께 개인 사생활의 침해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꼭 필요한 법이다. 그 이유와 목적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좋은 목적의 법이나 규정이 오용되고 부작용을 낳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 프라이버시 법도 다운사이드가 있다.
부모인데도 (따라서 환자가 아직 학생이라면 환자의 복지와 안전, 비용을 책임진다) 자식이 18세 이상이면 의료 관련 사항을 볼 수 없고 얘기(discuss)할 수도 없다. (환자가 쌍방에게 다 릴리즈를 해 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또 많은 부모들이 학비의 전액 또는 대부분을 부담하는데도 자식의 학교 성적표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불합리하다. 성적표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아들에게 요구해 놓았는데 아직 아들은 답을 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구차하게 자식에게 요구인지 요청인지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 나는 퍽 못마땅하다.
성적표를 못 보게 된 것은 자식이 낙제를 한 정도가 아니라면 사실 그래도 크게 대단한 일은 못된다. 그러나 수년 전에 한 아이비 리그 명문대학에서는 어느 한국 이민 2세 학생이 자살을 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은 그 부모에게는 청천 벽력같은 일이었고, 사후에야 이 학생이 이미 수개월간 학교의 정신과 의사에게 우울증 치료를 받아 온 것을 알게 된 이 부모는 (의사의 고용인인)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부모의 입장으로는 이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 대해 학교가 부모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자식을 죽음에서 구할 수도 있었을, 부모로서의 ‘알 권리’를 박탈당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학교가 ‘사생활 보호법’을 지킨 것이므로 법적으로 잘못한 일이 없다는 무죄 판결이었다.
나도 대학생인 자식을 둔 부모로서 이 판결을 보고 무척 착잡한 심정에 빠졌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오랜 세월동안 의사, 변호사, 신부 등의 직책에 있는 사람들은 비밀 보호(confidentiality)의 의무와 급박한(imminent) 위험, 사망, 사고, 살인 등을 알리고 방지할 책임 사이에서 고민해 왔고, 그 누구도 쉽게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지난 해 워싱턴 주변 지역에 스나이퍼들에 의한 무차별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신부는 범인으로부터 고백 성사를 하는 듯한 전화를 받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 신고는 수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전화가 정말 고백 성사였는지 논란의 여지가 많고, 결과적으로 이 신부는 옳은 일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도 한동안 주저했을 것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살한 명문대 학생의 부모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내가 그 학생의 의사였다면 자신 있게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정상적인 부모 자녀 관계와 상황에서는 보통 자식이 아프거나 사고가 났다면 부모가 끝까지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러나 정신질환처럼 환자 자신이 부모에게도 숨기려 하는 병이 있거나 부모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고가 나고 환자가 의식 불명이라고 생각해 보자. 어찌어찌 하여 부모가 자식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의사나 병원 측과 전화를 한다고 치자. 환자의 릴리즈가 없다고 병이나 사고, 또 그 치료 내용에 대해 일체 함구한다면 부모로서 심정이 어떨 것인가?
위험한 상황에서 환자가 무의식 상태일 때 프라이버시 법에 무슨 다른 예외 조항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모든 부모들이 좀 더 연구를 해 봐야 할 과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부모들은 미리 미리 자식에게서 릴리즈를 받아 놓아야 할 것이다.
/애팔래치안대 정보기술 시스템 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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