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경계인’이라는 단어가 나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 삼십 여 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송두율 교수 자신이 스스로를 규정하면서 사용한 ‘경계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의미의 다양성과 깊이에 사로잡혀 있다. “경계의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에 서 있는 탓에 경계인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고 송두율 교수가 규정하듯이 경계인은 자신이 속한 공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어디에 서 있느냐고 묻는 물음에 적극적으로 대답하기도 곤란하다. 경계인들의 의식과 행동은 어느 한 쪽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혼란스럽고 이해되지 않는다. 경계인은 어느 한쪽 편에 서서 그 체제가 주는 편안함에의 유혹과 속박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사실 송두율 교수 이전에도 많은 경계인들이 있었다. 6.25 전쟁 후 남도 북도 아닌 제 3국을 선택한 전쟁 포로들이 그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경계인은 이분법적 사고, 이? 橘萱?이데올로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사유의 지평을 조금만 확대한다면 지금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놀라게 된다. 백인과 유색인, 동양과 서양, 신자와 비신자 등등의 수 많은 구별짓기가 교차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결국 그러한 구별짓기는 편가르기로 이어지고 모든 낯선 것에 대한 배척으로 때로는 폭력으로 드러난다.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악의 축이라는 논리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삶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분은 어떻다고 규정될 수 없는 회색 지대에 놓여 있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체제나 질서로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철저한 자본주의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에 살면서도 우리는 한편으로 자본 이상의 미덕이 있다고 믿고 또 추구한다.
삶에 활력을 주는 새로움은 기존의 틀 안에서가 아닌 밖에서 주어진다. 타인의 시선에는 모호함으로 보이는 그 회색 지대가 나에게는 숨 쉴 수 있는 공간일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엮으려는 신화를 버린다면, 우리는 경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경계에 서 있기를 선택한 이들의 용기를 존중하자. 어차피 우리들도 희망과 절망 사이의 경계에 놓여져 있는 경계인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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