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화마가 휩쓸고 간 25일 밤, 중산층 주택 밀집지인 샌버나디도 시 북쪽 노스 샌버나디노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낮 동안 하늘을 뒤덮었던 불길과 시커먼 연기의 기세가 수그러지자 전소된 수백 채 주택의 잔해가 사방 천지에 널려 있었다. 거대한 숯 덩어리로 변모한 목조주택 잔해 사이사이에는 도시 가스관에 옮겨 붙은 불길이 ‘쉬이익’ 고음을 내며 붉은 혀를 날름댔다.
잔해 속에 을씨년스럽게 서있던 붉은 벽돌로 지은 굴뚝들이 불빛 속에 어른거렸다. 공습 직후의 처참한 전쟁터가 된 주택가.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밤 11시가 넘었지만 소방관들의 화재진압은 아직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한 블록의 주택 20여채가 한꺼번에 불탄 ‘치키다 래인’에서 용케 피해를 모면한 주택 지붕에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콜튼시 소방국 요원 10여명이 소화전에 연결된 호스로 물을 뿌리기 시작하자, 이를 기다리기도 한 듯, 잠잠했던 샌타아나 강풍이 갑자기 기승을 부렸다.
불길은 물대포를 쏘아대는 소방대원들을 조롱하듯 더 거세졌다. 불을 향해 물을 뿌리던 소방요원들이 호스의 방향을 돌려 아직 불길이 옮겨 붙지 않은 옆집 지붕에 물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집만이라도 살리겠다는 노력이었다.
화재진압 작업이 계속되는 동안 주택가 도로변 아름드리 나무들은 옮겨 붙은 시뻘건 불길에 여전히 온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1,000여명이 넘는 소방대원들이 동원됐지만 미처 가로수에는 손길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델로사 길 건너편 아르기일 에비뉴에 있던 한인 윤덕수(57)씨의 주택도 전소됐다.
소방차가 뿌린 물과 뒤범벅이 된 잔해를 보며 윤씨는 오후 2시께 점심을 먹고 직장에 나갔다가 산불이 주택가로 옮겨 붙는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와 보니 벌써 집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며 망연자실해 했다.
먼 뒷산에서 붙은 산불이 순식간에 주택가를 덮치는 바람에 집안에 있던 귀중품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고 한다. 윤씨는 집이야 새로 지으면 되지만 아이들을 키우며 촬영한 사진과 비디오는 대체할 수가 없는 소중한 것들이라며 불길에 휩싸인 먼 산을 바라보았다.
자정을 넘기며 린우드 길 북쪽 방향의 교통통제가 느슨해지자 대피했던 주민들이 하나 둘씩 집터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난 59년부터 마운틴 길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로저 스펜서는 또다시 불기 시작하는 바람에 날리는 수많은 불씨를 가리키며 화재 피해를 모면한 오늘의 행운이 내일까지 계속 될지 알 수 없다며 불안해했다.
샌타애나 바람을 타고 남가주 전체를 널름거리고 있는 산불은 이들 모두에게 날벼락 같은 재앙이었다. 재앙의 현장은 생각 보다 처참했다.
<글 김경원·사진 김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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