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내에서는 경제활동이 보통 문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거래 당사자들의 의무와 권리 등이 문서화되고 분쟁이 생기면 이들 서류에 의거해 해결한다. 문서를 단순히 서명을 위한 서류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서명자는 그 내용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된다. 서명 자체가 허위이거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닌 이상 서명자는 서류에 기재된 내용에 대해 추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따라서 문서내용에 확신이 없다면 절대로 서명해서는 안된다. 한글 법률서류도 이해하기가 힘든 판에 어떻게 영문서류를 읽고 이해하라느냐며 항변할 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으면 중요한 부분을 설명해달라고 요구해야한다. 더 좋은 방법은 서명 전에 사본을 받아서 법률적인 내용은 변호사와, 숫자상의 문제는 회계사와 검토하는 것이다.
간혹 중개인(부동산뿐만 아니라 보험 등 금융상품을 중개하는 사람이나 융자 브로커도 중개인이라 할 수 있다)중에는 변호사나 회계사가 끼면 거래가 깨진다면서 한사코 보여주지 않으려든다는 얘기도 들린다. 무언가 감추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일까? 감추고 싶은 것이 없다면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공정하게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변호사나 회계사의 자문때문에 거래가 깨질 이유는 절대로 없다.
한인사회에서는 문서에 서명하는 일이 요식행위 정도의 관행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 보인다. 문서내용을 살펴보거나 질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명하라는대로 제까닥 서명해준다. 간혹 변호사나 회계사의 자문을 받고난 후 서명할테니 서류를 미리 내달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다들 그렇게 하는데 왜 유별나게 구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행위가 복잡다단해지고 있는 세태에서 자기 권리를 챙기겠다는 사람을 유별난 사람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물론 서류따위로 이상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살다보면 별난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있으므로 그에 대비하겠다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거래 상대방의 인격만 믿고 돈이 오가는 경제행위를 했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간혹 에스크로를 했으니까 내용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변호사가 에스크로를 했을 때에는 문서내용이 확실하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에스크로를 하는 사람은 거래 쌍방 중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져있다. 에스크로의 역할은 합의내용을 문서화해주는 것일 뿐 그 내용에 대해 자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에스크로를 변호사가 했으니까 틀림없다고 할 수는 없다.
제대로 된 에스크로라면 클로징을 하는 날 서류를 보여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 클로징 예정 며칠 전 미리 서류를 거래 쌍방에 보내서 그네들의 변호사나 회계사로부터 자문을 받도록 권한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사전에 서류를 보내지 못했다면 서명받기 전에 반드시 시간을 내서 서류내용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한다. 그 서류에 기재된 내용에 따라 거래 당사자들의 권리와 의무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런 절차를 생략하고 서명을 요구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자신들에게 법적책임이 전가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귀찮음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로징을 빨리 하려고 고객이 서류검토를 할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부동산 중개인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그의 행위는 자신을 위해서도 위험천만하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서류검토를 방해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자체는 믿되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자신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도록 관계 서류를 검토하는 자세는 경제활동에서 반드시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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