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는 9월을 너무나 가슴 아프게 보내는 한인들이 있다. 지난 2001년 9월11일,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테러사건. 세계적인 도시 뉴욕의 상징인 맨하탄 월트레이드센터를 무너뜨린 여객기 폭파사건. 9월만 되면 이 사건으로 어처구니없이 숨진 희생자들의 가족은 더욱 가슴 아파 여니 때보다 더 견디기가 어려운 고통의 눈물을 흘린다.
비극의 뒤안길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한인희생자 18명의 가족들이다. 당시 34세로 숨진 강준구씨의 어머니 강필순(63. 서니사이드)씨는 아직도 슬픔을 가누지 못하면서 가까스로 아들을 추억하는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인터뷰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이런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는가. 꿈에서라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비행기가 빌딩을 가로지른다는 것은 만화에도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을 보고, 당하고 우리가 산다니... 어떻게 비행기가 그 큰 빌딩을 갈라 3,000여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을 불구덩이에 넣을 수가 있느냐. 원수 빈 라덴은 잡아죽여
야 된다. 강씨는 테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시종일관 눈물을 닦아내며 목소리 높여 테러를 규탄한다.
테러리스트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 여파로 지금 미국만 아니라 세계각국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다. 테러는 있어서도, 절대 용납돼서도 안 되는 근절돼야 하는 범죄 중의 범죄라며 강씨는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지구를 어지럽히는 이 세력들을 반드시 근절시켜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그는 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산업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아
까운 목숨들을 테러리스트들이 하루아침에 앗아갔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어 한꺼번에 모두 죽어야 했는가.
아들이 그렇게 참혹하게 죽은 걸 생각하면 새처럼 가슴이 졸아들어 더 이상 그 때 일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잘라 말한다. 그들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아픔과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씨
는 이 현실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면서 어떠한 이유로든 테러리스트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사건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고아가 수 천명이 나왔으며 형제, 자매, 자식을 잃은 사람도 몇 천명이나 된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 사건으로 강씨네는 아들이 죽은 후 두 손녀딸을 데리고 며느리가 타 주에 사는 언니 네로 가는 바람에 아들네 4식구를 한꺼
번에 잃은 셈이다.
아들 잃고 손주까지 보기 힘들어 테러로 인해 얻은 강씨 부부의 상처는 이만 저만이 아니다. 눈물로 보낸 3년, 세월이 가고, 또 가면서 생각해보니 젊은 나이에 느닷없이 남편을 잃은 며느리의 처지가 너무나 불쌍하다며 강씨는 며느리도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을 생각하면 더욱 견디기
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아픔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있다고 강씨는 덧붙인다. 항상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아들과 한 때 단란했던 모습의 아들 며느리가 두 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꺼내 보이며 강씨는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와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는 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떠난 사람이 돌아올 리 없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어딘가에 아직도 아들이 살아있는 것만 같다. 어디 머나먼 곳으로 여행가 언젠가는
마치 돌아올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가느다란 희망을 내비친다.
당시 아버지 강성순(66)씨는 한인회관에서 오전 10시 열린 한인봉사센터 직업훈련 프로그램 모임에 참석했었다. 그 곳에서 월트레이드 센터 빌딩이 폭격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아들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맨하탄 14가를 향해 달려갔다고 한다. 이미 그 때는 화염 속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민간인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이 통제된 상태였다. 이
후 강씨 부부는 각 병원마다 아들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쫓아다녔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품이나 뼈 조각 하나 찾지 못한 채 아들의 모습을 영영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2001년 9월11일, 그 날이 바로 아들과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마지막 작별의 날이었다. 준구씨는 강씨 부부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강씨 집안에 27대 종갓집 장손이었다. 그는 월트레이드센터 104, 105층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증권회사 켄터피제랄드사(희생자 658명)내 이스피드에서 거액의 자금을 관할하던 총 매니저였다.
어머니 강씨에 따르면 준구씨가 맡고 있던 분야는 회사 전체 자산 가운데 약 70%를 다루는 곳으로 강씨는 그만큼 능력 있고 성실한, 그래서 회사로부터 크게 신망을 받고 있던 터였다. 강씨는 성장시절 부모 속 하나 안
썩이고 너무나 잘 자라주어 집안의 기둥이자 희망이었다고 한다.
강씨 부부는 한국 지방에 살다가 준구씨가 5세 때 아들 교육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다. 준구씨는 중학교 3년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다니다 미국으로 이민 와 곧바로 특수고등학교인 브루클린 텍 고교에 입학했다. 수학을 잘해 컬럼비아 의과대학에서 입학허가서를 받기도 했지만 적성이 아니어서 찾은 곳이 버룩칼리지. 대학에서 그는 경제경영학을 마치고 커
넷티컷과 뉴저지에 있는 보험회사에 10년간 다녔다.
불행을 당하기 1년 전 증권회사에 입사, 이날 출근했다 다른 직원들과 함께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는 일을 잘하고 책임감도 강해 켄터피제랄드 회사로부터 스카웃 돼 옮긴지 2개월만에 매니저가 될 정도로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었다. 그는 회사에 들어가서도 언제나 제일 일찍 출근해 다른 직원들이 나오면 일할 수 있도록 컴퓨터를 다 켜놓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준구씨는 활동력과 지도력이 강한데다 신앙심도 돈독해 직장 외 교회에서도 고등부, 대학생부, 청 장년부의 회장직을 줄곧 맡아 활동했다. 운동도 못하는 것이 없어 상도 많이 받았고 대학에서도 볼링 주장을 맡을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또 기타도 잘 치고 색소폰도 잘 불어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주위와 강씨 부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회갑여행으로 알래스카에 2주간 효도관광한 부모를 준구씨가 공항에서 오가며 픽업할 때 본 것이 강씨 부부가 아들을 본 마지막이었다. 강씨 부부는 이날 밤 뉴저지 아들집에서 자고 준구씨가 다음날 일찍 회사에서 야유회 간다고 나간 뒤 뉴욕의 집으로 돌아왔다. 준구씨는 일요일 교회(뉴저지 안디옥 장로교회)에 갔다 와서 월요일 출근했다 이같은 변을 당한 것이다.
한인 희생자 유족회(회장 김평겸)에 따르면 한인 희생자 가족 중에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날마다 울음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정신차려 묘지를 세우거나 장학사업을 하지 않으면 선교사업을 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더 이상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무언가 비참하게 죽은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사업을 해서 그들의 영혼을 달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유족들의 다짐이라고. 강씨도 이제는 애써 슬픔에서 벗어나 아들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하루하루 또 새로운 날을 맞이하고 있다.
기도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믿음으로 이겨내는 생활이다. 오늘도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그리워하며 환자들을 돌보는데 여념이 없다. 강씨는 지난 4년 동안 병원이나 양로원에서 환자를 보살펴온 전문 홈케어다. 뉴욕 순복음교회에서도 봉사를 주 5일간 열심히 하고 있다. 바쁘지 않으면 아들 생각이 나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오늘도 강씨는 열심히 일을 하면서 아들의 죽음을 희망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여주영 논설위원(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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