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과 유대인간의 친목단체인 한유협회(KAJA, Korean-American Jewish-American Forum)의 유대인 공동의장인 조지 벌스타인(75·George Berlstein)씨는 한국과 한인이라면 무조건 좋다는 유대인으로는 보기 드문 친한 인사이다.
한국전쟁 때 미군으로 참전한 것이 한국과 첫 인연이었고 그 후 한국과 비즈니스 관계를 가졌던 그는 한국음식을 모두 좋아하고 특히 비빔밥이 최고라고 한다. 지난달에는 한국의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8일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한국에 대한 인식이 더욱 새로워졌다고 했다.
벌스타인씨는 방한기간 동안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놀랐고 한국인들의 친절에 놀랐다고 한다. 그는 혼자서 백화점에도 가 보고 지하철도 타고 서울을 구경했다. 그리고 판문점에도 가 보고 이천에 가서 도자기를 직접 만드는 등 문화 체험도 했다. 또 동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유대학과가 있는 건국대학교에서 ‘미국의 유대인’이란 제목으로 강연도 했다.한국에 있는 여러 분야의 한국인들과 대화를 통해 그는 한국사회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것도 느꼈다.
젊은이들이 매우 진보적인 데 반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매우 걱정하고 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문제를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그 발전과정에서 이런 문제가 나타날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국에 민주제도가 보장되어 국민의 의사가 선거를 통해 결정될 수만 있으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벌스타인씨는 어린 시절에 미국에 이민을 온 1.5세 유대인이다. 4년 전 은퇴할 때까지 뉴욕서 변호사 생활을 했다. 세무와 법인, 증권, 인수합병, 국제법이 그의 전문 분야였다. 군법무관 시절을 포함하여 45년간 법조인 생활을 하면서 그는 주로 독일과 아시아 등 외국계 회사의 변호사로 활약했고 세법과 인수합병 등에 관한 저서를 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유대인 변호사 가정에서 출생한 그는 9살 때인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마치 유명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스토리처럼 오스트리아를 탈출한다. 가족이 모두 한꺼번에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린 벌스타인씨가 먼저 영국에 있는 유치원으로 보내졌고 그 다음 해 5월에 어머니가, 또 6월에는 아버지가 영국으로 탈출하여 가족이 합류했다. 영국에서 그 해 9월 세계 2차대전이 일어나자 벌스타인씨 가족은 다음 해 미국으로 건너와 브루클린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는 1953년 예일대 법대를 졸업한 후 공군에 징집되어 군법무관으로 1955년 한국에 가서 13개월 근무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그는 군검찰관과 군 변호사로서 한국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사건의 목격자를 찾아 여러 곳을 여행하기도 했고 한국 경찰과 협조하는 일도 많았다.
한국에 미국의 전투기를 판매할 때 그는 미군 변호사로서 법적 수속을 맡기도 했다.그러면서 틈틈히 한국문화를 익히기도 했는데 당시는 한국이 못 살던 때였으므로 문제도 많이 생겼다고 한다. 오산에서 서울까지 미군의 휘발유 송유관이 있었는데 송유관을 따서 휘발유를 훔쳐가는 절도사건이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에게서 냄새가 많이 났던 것도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10년 전 비즈니스 때문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런 인상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고 한다. 한국의 호텔이 미국보다 더 깨끗하고 위생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군에서 제대한 후 캘리포니아에서 잠시 변호사 개업을 했다가 1957년에 뉴욕에 정착하여 변호사로 일해 왔다. 한편 그는 유대인 사회의 단체활동에 40여년간 참여하여 롱아일랜드에 살면서 아메리칸 주이시 커미티의 롱아일랜드 지부장을 지냈고, 15년 전 맨하탄으로 이사하면서 이 단체의 뉴욕지부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
벌스타인씨에 따르면 이 단체는 100년의 전통을 가진 유대인 권익옹호단체로 유대인 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인종의 권익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이 단체는 떠들썩하게 궐기대회를 하거나 퍼레이드를 벌이는 등의 일은 하지 않지만 유대인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각계에 로비를 하고 다른 민족의 커뮤니티를 찾아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KAJA, 즉 한유협회를 만든 것도 이런 활동의 일환인 것 같다.
2년 전, 그의 주도로 결성된 KAJA는 한인과 유대인 멤버로 구성되어 있고 그와 함께 한인 공동의장은 김재택 박사가 맡고 있다. 이 단체는 그간 두 민족간의 친목을 위주로 공식, 비공식 접촉을 계속하여 이제는 형제 사이와 같은 친밀감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 이 단체는 그동안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한인과 유대인 합동음악회를 개최했고 미국인 초청 정치토론회, 유대인 초청 웍샵 등을 가졌다.
KAJA의 공동의장인 김재택 박사는 한인들의 모임에서 미국정치인을 부르면 응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유대인과의 모임에서 부르면 누구든 거절하
지 못한다면서 이 점을 활용하여 KAJA를 통해 한인들이 주류사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벌스타인씨는 앞으로 자신이 KAJA를 통해 할 일이 많다고 한다. 미국 내의 학교마다 한인학생회와 유대인 학생회가 있는데 이들 학생회를 연결시켜주어 인종차별을 막고 증오범죄에 공동 대처하는 등 협력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또 이민과 교육 등 정책문제에 관해 정치권과 채널 역할을 할 수 있고 한인교회와 유대인교회의 합동세미나 등 교회간의 교류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과 이스라엘이 한 때는 국교를 단절하는 소원한 관계였으나 지금은 아주 좋은 관계라고 했다. 그 당시 중동에서 석유를 수입해야 했고 건설공사를 많이 수주해야 했던 한국으로서는 아랍국가들의 환심을 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그는 이해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북한문제가 있고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문제가 있어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인들에게 북한문제를 바로 인식시키고 문제의 해결책을 교육하는 것도 KAJA의 할 일이라고 했다.우리 한인들은 유대인들에 관해 옳던 그르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많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긍정적인 면은 부지런하고 가정적이고 자녀교육에 열성적이고 미국의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에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이다. 부정적인 인식은 너무 이기적이고 돈만 밝히고 인정사정을 모른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일반 유대인들의 한인들에 대한 인식은 어떠할까. 벌스타인씨는 이에 대해 일반 유대인들은 한인들에게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고 관심도 갖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KAJA의 역할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한인과 한국을 아는 벌스타인씨에게 우리가 기대할 일이 너무도 많을 것 같다.
<이기영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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