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다가오면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 받으며 많은 사람들은 선물을 받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런데 선물을 받기 보다는 불우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나 기관들이 있다. 지난 1997년부터 한인과 다른 민족의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뉴욕 자비량다민족선교회가 바로 그런 기관 중 하나이다.
자비량선교회는 12월 들어 지난 4일에는 조선족과 입양인들이 장애인들과 가족들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하고 즐기는 성탄 축하행사를 가졌고 11일에는 입양인들의 파티를 가졌다. 또 23일에는 조선족 파티, 스패니쉬 파티가 계획되어 있고 24일에는 경로회관을 방문하여 선물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행사는 대부분 선교회가 시작된 후 매년 진행되고 있는 행사들인데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다.
자비량선교회를 설립하여 이끌고 있는 김진홍 목사는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교회는 불우이웃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이 선교회는 남의 것을 얻기 위한 모금은 하지 않고 후원자들로부터 들어온 돈을 대부분 불우이웃 돕기에 쓰고 있다.
선교회 이름이 자비량다민족선교회인 것에서도 이 선교회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란 자비량이란 이름을 쓴 것은 일찌기 사도 바울이 천막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선교사업을 했던 것을 본받아 선교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생업에 종사하면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선교회의 각 부서 책임자와 직원, 자원봉사자는 70여명인데
목사, 전도사, 신학생과 소셜워커, 의사, 변호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선교회의 대표인 김목사도 럿거스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또 다민족선교회라고 한 것은 다민족이 모여 사는 뉴욕에서는 한인 뿐 아니라 다른 민족도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 선교회는 조선족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고 기술교육을 하고 직업을 알선해주는가 하면 야유회와 파티 등 위로행사도 개최한다. 또 입양인들에게는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쳐 이들에게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 입양인을 기독교인 한인가정의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개인적인 관계에서 한인사회와 가까워지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자연스럽게 복음에 접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
다른 민족으로는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스패니쉬 종업원들에게 봉급을 주어가면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할렘의 흑인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실, 태권도 교실, SAT 교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렇게 선교사업이 확장되다 보니 성서학당과 본부가 있는 포트리 사무실 이외에 플러싱의 조선족 선교 사무실, 맨하탄의 스패니쉬 선교 사무실, 뉴저지 티넥의 입양아 선교 사
무실이 있고 퀸즈의 잭슨하잇츠에 성인 입양인학교를 곧 개설할 계획이라고 한다.
할렘의 선교 프로그램은 4년 전부터 중단 상태에 있는데 내년부터 재개될 것이라고 한다.이 선교회의 대표인 김목사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교인으로 자라왔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교회를 다녔고 대학에서는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기독교에 대한 신념과 체험을 하게 된 것은 1985년 아칸소주립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도미유학을 한 이후의 일이다.그는 한국에서 교회에 다니면서도 교회당을 짓기 위해 빈민촌을 강제 철거하는 현장을 보면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하고 있느냐는데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미국 교인들이 삶 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에 대한 확신을 찾았다. 도미후 처음에는 심리철학을 공부했으나 중도에 몸이 아파서 쉬게 되었는데 다시 공부를 하게 될 때 그는 신앙을 철처히 찾기 위해 산호세에 있는 바이블 칼리지로 옮겨 성경공부를 했다.
그 후 다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그는 한국과 미국의 유명 부흥사들을 찾아 신유기도를 받은 끝에 병 고침을 받은 신비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이블 칼리지를 마치고는 일리노이주의 크리스찬 세미나리에 들어가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한인교회의 전도사로 봉사했지만 목사로 안수받을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네브라스카대학에서 그에게 교목 자리와 함께 박사학위 과정을 제의했는데 목사로 안수받을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그리하여 1990년 목사 안수를 받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그는 네브라스카대학을 거쳐 프린스톤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컬럼비아대학에서 동양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목사가 오늘처럼 이웃 선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유학 직후부터의 일이다. 1986년 캘리포니아에서 바이블 칼리지에 다니면서 교회 전도사로 일할 때 한국에서 불우청소년들을 갱생시켜 제 3세계의 선교사로 내보내는 평신도 선교사운동이 시작됐다. 그는 미국에서 이 운동을 후원해 왔는데 한국에서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평신도를 선교사로 내보내는데 애로
가 많았기 때문에 그가 뉴욕에 온 후 1990년부터 뉴욕에 선교본부를 두게 되었다.
그 후 한국에서 왔던 선교사가 귀국해버리자 김목사가 그루터기 불우청소년 선교회를 만들어 1994년부터 할렘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면서 흑인 선교를 시작했다.
한편 그는 1994년부터 프린스턴 소망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시무하기도 했는데 1997년 말 이 교회를 사임하고 뉴욕자비량다민족선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이웃 선교에 나섰다. 한국에서 결혼하여 함께 도미한 부인도 김목사와 함께 신학을 공부하여 4년 전 미국 감리교 목사로 안수 받았다. 현재 뉴욕 업스테이트에 있는 미국인감리교회 2곳을 담임 목회하고 있는데 김목사의 유력한 동역자로 힘을 보태고 있다고 한다.
김목사에 따르면 플러싱에는 8.000명 이상의 조선족이 있는데 이 가운데 4~5% 정도가 교회에 나가는 실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선교회의 무료영어, 컴퓨터 교육생 30~40%가 기독교인이며 교인들은 기독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그 중에 3명이 신학을 공부하고 있고, 이미 중국에 선교사로 나간 조선족도 있다는 것이다. 조선족 선교는 앞으로 중국 복음화
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그는 내다보고 있다.
그는 이 세상이 더불어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의 이웃이며 누가 누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인들이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면서 조선족과 스패니쉬를 종업원으로 쓰고 있으니 이들이 우리와 서로 돕고 사는 이웃이라는 말이다.
그가 프린스턴 소망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을 때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인들끼리 선물을 나누는 것을 보고 교인들이 서로 주고 받을 것이 아니라 모두 선물을 준비하여 양로원을 방문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교인들이 양로원을 다녀온 후 그렇게 즐거워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비량선교회의 사무직원의 급료는 정부가 지급해 준다. 또 선교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직업을 가지고 무료로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부금은 불우이웃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 김목사가 강조하고 있는 교회와 삶의 일치는 이렇게 이웃에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는 선교로 실천되고 있다.
이기영<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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