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조선에 첫 해군무관으로 파견됐던 조지 포크(George Foulk) 소위가 미국 근세 사상 첫 해외 첩보원이며 그는 다방면에서 우수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미 중앙정보부(CIA)가 비밀 연구논문을 통해 밝혔다.
역시 해외 첩보원으로 활동하다 은퇴한 존 F. 프라우트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은 CIA에 제출한 ‘조선의 첫 미 해군무관(The First US Naval Attache to Korea)’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같이 알리고 “포크 소위는 문화와 풍습, 언어가 다른 조선에서 3년간 각종 군사, 정치, 사회 정보를 정확하게 입수, 미국의 극동 아시아 정책 마련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이런 점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후배 첩보원들이 그를 사표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논문에 따르면 포크 소위는 조-미 수교 협약에 의거, 워싱턴D.C. 뉴욕, 보스턴 등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조선 특별사절단을 따라 1883년 조선에 개관한 미 공사관 최초 해군무관이 됐다.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27세였던 포크 소위는 정보수집 교육 및 경험이 없었음에도 조선 언어와 풍습, 문화를 신속히 터득해 조선왕조 대신들과 가깝게 지냈다. 심지어는 고종황제로부터 군사 자문관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정중히 거절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논문은 특히 1884년 12월 서울에서 일어난 무력 소요로 포크 무관도 전 재산을 잃고 미 정부로부터 신속한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자 당시 조선 우표 등 기념품을 미국의 친지를 통해 판매, 그 수익금으로 활동자금을 마련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포크 무관은 고종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 것으로 판단한 중국이 조선 조정으로 하여금 포크를 ‘소환(리콜 Recall)’토록 공작을 펼쳤고 조선과 마찰을 우려한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3년간의 첩보원 생활을 접었다. 포크는 군에서 전역한 뒤
일본 여성과 결혼, 일본에서 생활했으며 37세였던 1893년 8월2일 등산을 나간 뒤 3일만에 숨진채 발견됐다.
<신용일 기자> yishi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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