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민
이민일세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열심히 한국말을 가르치며 한글을 깨우치게 하는것을 본다. 그래서 집에서는 모두들 한국말만 사용하고 주말에는 만사 제쳐놓고 자녀를 한글학교엘 보내신다. 한글공부하기 싫다고 징징 거리며 아이들이 우는 모습이 눈에 선하고 부모님들이 섭섭해하며 다끄치는 소리도 들린다. 우리 이민역사의 초창기에 시작되어 한 부분도 빠짐없이 계속 이어지는 이 한글교육 의식절차는 아직도 엄숙해서 종교적이고 그래서 흔들리지않는 믿음 이나 깨달음처럼 처절하게 아름답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이민 일세 타 커뮤니티에서도 종종 보이는 클라식 케이스이다. 모국어 교육상황은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어떻게 다른가?
한인봉사쎈터는 지금은 없는, 1974년에 발족된 비영리 봉사기관으로 샌프란시스코 풀톤과8가에 위치해 있었다. 3세인 탐 김이 쎈터의 디렉터였는데 내가 대학생 시절 일을 하였던 이 쎈터의 특징은 1세, 2세, 3세가 같이 힘을 합하여 아주 효과적으로 이민자를 위한 봉사업무를 맡아 보았다는 것이다. 이 쎈터는 또한 어느 일류대학 연구소도 흉내내지 못하는 재미지식인들과 예술인들 활동의 터전이었다. 족히 십여년 동안을, 1세는 2세와 삼세에게 우리언어와지리, 예절과문화, 미술과 음악을, 2세와 3세는 1세에게 영어, 재미한인역사와 법, 문화를 자연스럽게 날마다 가르쳐 주고 배우며 우리는 빨리 많이 알게되고 서로 친근히 지내게 되었다. 제대로 봉사활동을 하려면 그 방법이 최고였던 것이다. 우리가 한인으로써 알아야 할 모든것에 대하여 우리는 그때 그곳에서 다 배웠다. 나는 그때 사탕수수밭 자손들인 이들을 볼 때마다 충정공 민영환의 자손을 본듯이 놀라면서 반가왔고 동학혁명에 참가했던 농민들의 혈통을 지닌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곤 했었다. 그들을 보면 눈만 감으면 유창한 영어실력의 미국인 인데 말을 않고 가만히 있으면 마치 유관순이 미국으로 독립운동을하러 온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인 것이었다. 2세 3세들은 1세인 우리가 그들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조상가족이 몇칠전 미국 이민을 오셨으므로 지극정성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조상이라고 모시고 받들었다. 물론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일을하며 오해할때도 많았지만 오해가 풀어지면 얼마나 오해의 이유가 우스웠는지 그 쎈터는 항상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활짝 열여진 문을 통한 길 밖까지도 쏟아져내리곤했다. 2세이셨던 프랭크 윤께서 화장실을 찾는분에게 한인봉사회 건물의 뒷간이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셨을때는 모두들 웃느라고 정신없었다. 뒷간. 얼마나 걸맞고 멋있는 표현인가?
조상들 그리고 차세대와 즐거이 같이 봉사활동을 할수있는곳을 찾으십니까? 한글교육,
뿌리교육, 한국문화교육 요새 안하는 곳이 어디있느냐구요?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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