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작품 가운데 성직이 요구하는 윤리적 의무와 인간적 감정 사이의 갈등을 다룬 ‘나는 고백한다’(I Confess)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서 가톨릭 신부로 등장하는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어느 날 교회 관리인으로부터 살인죄를 범했다는 고해성사를 듣게 된다. 그러나 신부는 그를 경찰에 고발하지 못한다.
성직자인 그에겐 시민으로서의 의무보다 “고해성사의 내용을 누설해선 안 된다”는 교회법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관리인은 고행성사를 통해 신부의 입을 봉해 놓은 후 증거를 조작,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든다. 이같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신부는 침묵을 선택하고, 결국 살인혐의로 재판정에 서게 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가톨릭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일부 전문업종 종사자들은 법이나 동업자 집단의 자체적인 윤리규정에 의해 업무상 취득한 정보를 공개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예컨대 변호사는 의뢰인과의 대화 내용을 철저한 비밀에 부쳐야 하고, 의사는 환자의 진료기록을 내돌릴 수 없다. 기자들이 취재원을 보호하는 것도 직업윤리의 주요 항목에 속한다.
특정 직업인에게 부과되는 이같은 윤리적 의무는 기본적으로 의뢰인과 환자, 취재원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이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이다.
최근 연방항소법원은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 신분누설 사건인 ‘리크게이트’와 관련, 취재원 공개를 거부한 뉴욕타임스의 베테런 여기자 주디스 밀러(54)에게 법정모독죄를 적용, 수감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밀러 기자가 언론계 내부규정인 취재원 보호 원칙에 따라 옥살이까지 감수해 가며 지켜주려는 정보 제공자가 국가의 중대기밀을 고의적으로 흘린 범법자라는 사실이다.
연방항소법원의 취재원 공개 명령도 바로 이 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마디로 취재원 보호원칙보다는 국가안보와 법적 정의 실현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내가 지키고 보호하려는 대상은 범법자가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자유와 기자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라는 밀러 기자의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기자 구속사태를 몰아온 리크게이트의 발단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아프리카 나이저로부터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을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이라크 침공의 명분을 쌓기 위한 그의 이런 억지 주장은 곧 저항에 부딪혔다. 바그다드 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했던 조셉 윌슨이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대통령의 주장이 허위임을 지적하고 나선 것. 현지 사정에 밝은 윌슨은 CIA의 요청에 따라 이라크의 대량 학살무기 보유 여부에 관한 조사를 이미 완료한 상태였다.
발끈한 백악관의 고위인사는 윌슨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부인 발레리 플레임이 CIA 비밀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몇몇 기자에게 흘렸다. 정체가 탄로 난 비밀 공작원은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최근 일부 언론은 이렇듯 무책임하게 국가 기밀을 누설한 장본인으로 칼 로브 백악관 비서실차장을 지목했다. 2000년과 2004년에 치러진 두 차례 대선에서 결정적 공을 세운 로브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오른팔로 꼽히는 인물이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로브는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난쟁이처럼 대통령의 등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제아무리 상하간의 충성과 의리를 중시하는 부시 대통령이라 해도 ‘대형사고’를 친 로브를 마냥 감싸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직업윤리 따위와는 거리가 먼 폭력조직 ‘백악관 파’의 보스가 아니라 “국가를 보위하고 국헌을 준수하겠다”고 국민 앞에서 두 번씩이나 약속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이강규<국제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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