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초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불모지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
광복 60주년 특집-잊혀진 고려인들
농업,체육,문화등 다방면서 두각 - 200여명 근로영웅 칭호
③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를 옥토로
중앙아시아 10여 곳에 각기 버려진 고려인들은 죽음 직전에서도 생존을 위해 스탈린에게 슬픔의 탄원서를 올렸다. 구 소련이 붕괴되고 신생 독립국이 출현한 이후 열람된 극비 문서에서 발견된 수많은 탄원서들은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고려인 강제 이주는 삶의 터전만 빼앗은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스탈린의 강제이주는 한마디로 한민족 문화말살 정책이었다.
중앙아시아의 땅은 염분이 많은 지대이거나 아니면 사람 키보다 높은 갈대가 무성한 곳이었다. 이듬해부터 고려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시작된다.
고려인들은 특별한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갈대를 꺾고 염분이 많은 땅을 물을 대서 염분을 씻어내며 황무지를 일궈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손이 문드러질 정도로 일을 했다.
고려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씨를 뿌려야 했던 것이다. 연해주에서 축적된 벼농사의 저력을 살려 그 이듬해부터 고려인들은 벼를 수확하기 시작했고, 목화 재배에도 성공을 했다.
고려인들은 그들이 자유롭게 이주를 할 수 없었고, 정치적인 활동도 할 수 없었기에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농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농업에 몰두했고, 또한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 고려인들이 농업 성과를 이루어낸 바탕에는 그들의 근면성이 있었다. 부지런함이야말로 그 시대 고려인들의 민족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한국학 전문가인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경제연구소 부소장인 밀네르 박사는 “고려인들의 근면함과 그들의 경제적 애국주의는 가히 놀라운 그들만의 특성이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은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벼농사는 연해주에서의 경험이 있다지만, 목화 같은 식물은 처음 본 것이었지만 곧 기록적인 수확을 하기 시작했다.
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210명의 고려인들이 사회주의 근로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인구 비로 볼 때 고려인들이 가장 많은 상을 받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44만 명의 고려인들 중 210명이 근로영웅이었다.
고려인들은 농업 외에도 공업, 과학, 문화와 체육 등에서 재능을 보이며 그들 스스로의 삶과 터전을 타향객지에서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그야말로 사막을 옥토로 바꾼 신화를 창조해 내었다.
<새크라멘토 지국 - 김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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