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마당에서 집안으로 들어서다 무심코 TV를 켠다. 마침 KOCE 공영TV에서는‘플라잉 더치맨’안드레 류의 콘서트가 방영되고 있다. 엉거주춤 탁자에 걸터앉아 그 매머드 공연을 지켜보다 또 다시 마법에 걸려든다. 류의 콘서트가 끝난 뒤에는‘호텔 르완다’를 틀었나, 끝 장면이 맹물 같았던 문근영의‘댄서의 순정’을 봤나….
모처럼 선선하고 고즈넉해서 좀 쓸쓸하기까지 했을 주말 저녁은 그렇게 날아갔다. 그날 저녁 계획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읽다 접어놓은 책도 여러 권이고-. 영상매체에 사로잡힌 비문학의 시대를 몸으로 체험했다고나 할까. 모니터 앞에 껌처럼 달라붙어 있다고 아이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화려해서 장엄하기까지 한 할리우드, 그대 앞에서 서면 문학은 언제나 너무 작고 초라하다. 미국 신문의 캘린더란에서 문학이 실종된 지는 오래됐다. 가끔 북 리뷰 정도가 문학의 흔적을 담고 있다.
캘리포니아에는 주 계관시인(the state poet laureate) 제도가 있다. 주 의회가 캘리포니아의 대표 시인을 선정해 그에게 계관시인의 영예를 부여하는 이 제도는 90년 전에 시작됐다. 원래 무보수 명예직이었으나 몇 년전 법이 바뀌어 계관시인에게 1만달러를 지급하는 대신 임기도 2년으로 제한했다. 캘리포니아가 계관시인제를 도입한 것은 시를 대중과 좀더 가까운 자리에 놓기 위해서다. 계관시인이 되면 임기 중에 6번이상 공중 앞에서 시를 이야기하는 자리를 가져야한다.
지금의 계관시인은 버클리와 스탠포드 등에서 시를 가르치던 흑인시인 알 영(66). 그는 시가 미국의 주요 엔터테인먼트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19세기만 해도 사람들은 시를 암송하고, 둘러앉아 시집을 읽었다. 그는 T.S. 엘리옷이나 에즈라 파운드 같은 모더니스트들을 비난한다. 시를 어렵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사람 속에 있던 시가 학문의 세계로 사라지게 된 데에는 이들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제2대 주 계관시인은 지난 주말 공중 앞에 첫 선을 보였다.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스테이트 페어가 데뷔 무대였다. 접는 의자가 수 백개 놓인 야외극장에서 계관시인의 시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80여명. 시 낭송회가 끝난 후 15분쯤 뒤 시인들이 북 사인회를 하고 있는 동안 야외극장은 만원이 됐다고 외신은 전한다. 뒤이어 야외극장에서 통가 민속공연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주 계관시인의 데뷔 무대는 이 시대 비문학의 현주소가 어느 정도 인가를 잘 보여준다.
작품의 질은 제쳐두고라도 요즘 같은 때 문학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문학 보다 신나고, 재미있는 유혹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시를 적고, 소설을 쓰려면 적어도 TV 앞에서‘삼순이’나 ‘금순이’를 보는 대신 책상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짧은 글 하나도 정신없는 일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돌려세우지 않으면 쓰기 어렵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한 소설가는 최근 인터뷰에서 “재미도, 남는 것도, 상상력도 없는 문학이라면 나 자신도 대신 비디오 한 편을 빌려 보겠다”고 한다. 독자는 문학을 외면하고, 문인은 양산되는 아이러니한 시대에 우선 문학이 문학다워야 탈 비문 학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계관시인은 주 공립도서관 시스템에 시인들의 찻집 역할을 할 웹사이트를 만드는 등의 방법으로 교제와 나눔의 문학이 되도록 하겠다고 한다. 미주 한인사회의 독자들에게 읽히며 함께 호흡하는 문학을 하려면 미주 한인문인들은 무슨 일부터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미주문단에 남겨진 공동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우선 문학의 탈 아래 이뤄지는 비문학적 일들은 없는지 발밑부터 살펴봐야 하지 않을 지 모르겠다.
안상호 부국장·특집1부장
sanghah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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