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대 사위의 90대 장모사랑
▶ 치매 장모 4년간 극진히 간호한 이우영씨
살아 생전 미시간 호수의 푸르름을 바라보며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던 장모님의 모습은 지금도 뼈에 사무친다.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장모를 지난 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끼니를 챙기고 극진히 보살피다 지난 추수감사절 마침내 하늘 나라로 떠나 보낸 한 사위의 감동 어린 사연이 있어 코 끝을 시큰하게 하고 있다.
링컨우드에 거주하는 이우영(67)씨는 부인 이춘미씨와 결혼에서 35년 가까이 장모 정옥남씨를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고 살아오는 동안 단 한번도 장모님이라고 불러 본 적이 없다. 이씨에게 있어서 장모는 오히려 친어머니에 가까운 존재였다. 잘못을 했을 땐 마치 친 자식을 다루듯 거침없이 꾸짖고 손으로 등줄기를 때리기도 하셨던 장모님. 오죽했으면 노스브룩 소재 시카고 중앙교회를 다니던 중에도 한 10년 동안은 성도들이 정말로 이씨의 친어머니인줄 알았을까?
그러던 장모 정옥남씨가 알츠하이머(치매) 증세를 보였던 것은 그가 90세 되던 해였던 4년전 쯤이었다.
당시 장모님은 레익쇼어 근처 클러렌드 아파트에 살고 계셨어요. 워낙에 건강 하셨죠. 그런데 한번은 연락이 왔어요. 장모님이 국을 끓이려고 냄비를 올려 놓았다가 깜빡 하셔서 불이 날 뻔 한거죠. 그래서 그 후부터는 저희들이 직접 음식을 해서 갖다 드렸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은 아니었습니다. 장모님이 자꾸 쓰러지시는 거예요. 병원 의사의 말이 영양 실조라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장모님이 음식을 잡수셔야 하는 것을 잊어 버리시는 거죠.
결국 장모를 이씨의 집에서 모시게 됐다. 친어머니와도 같은 장모를 곁에 모시고 간호하고, 보살피는 일이 뭐 그리 어려웠을 까 마는 문제는 장모님의 증세가 더 이상 집에서 모시기에는 힘들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시고 난 후 힘이 나시면 어디론가 말도 없이 사라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어요. 경찰에 연락하고 이리 저리 찾아 다니는 일이 잦아 졌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방안이 필요했어요.
이렇게 해서 장모 정씨가 풀라스키길 소재 페어몬트 요양원에 입주한 것이 지난 2002년 11월 1일 이었다. 이 때부터 이씨의 장모 사랑은 말그대로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그는 장모가 지난 달 26일 추수감사절 오전 돌아 가실 때 까지 3년 넘은 세월 동안을 단 하루도 빠짐 없이 하루에 몇번이고 꼬박꼬박 방문해 장모의 요양원 생활에 불편이 없는지 일일이 챙겼다. 이른 새벽에 와서는 장모님의 말동무를 해드리고, 식사가 나오면 제대로 드시는지 확인을 해야 마음이 편했다.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가서도 요양원에서 연락이 오기만 하면 자정이 넘은 시간이든, 새벽이든 언제든지 장모 곁으로 달려갔다. 정씨가 세상을 떠나기 한 1년 전 부터는 혼자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까지 증세가 악화됐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는 이씨가 하루 세끼를 꼬박 꼬박 손수 음식을 장모의 입에 넣어 드렸다. 한달전 까지는 대소변도 가리시질 못했다. 그래서 이 씨는 장모의 엉덩이를 손으로 눌러 대변을 짜내는 그야 말로 친 자식이라도 하기 어려운 정성과 사랑을 보였다. 물론 이씨 혼자만 유별나게 장모에게 극진했던 사위는 아니다.
사위들인 곽귀섭씨, 조규남씨, 박재선는 물론 친아들과 딸 들 모두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장모님에게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곽귀섭씨는 당신 또한 연세가 든데다 자동차가 없는 데도 먼거리를 버스를 타고 달려와 장모를 만나셨지요. 조규남씨는 장로인데 일이 마치면 바쁜 와중에도 장모를 위한 기도를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박재선씨는 본인이 다린 한약을 매일 아침 장모님께 가져와 드시는 것을 보고 갔지요. 그 같은 감동으로 장모님의 심장에 찾던 물이 빠지더라니까요.
이제 장모님은 돌아가셨다. 임종을 하는 자리에 이씨 부부가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 보다는 한사코 보스턴에 거주하는 장손자의 이름만 부르시다 떠나 가셨던 장모님. 그러나 털 끝 만큼의 섭섭함도 없다. 수십년 동안 어쩌면 친 모자 이상으로 따뜻함과 정겨움을 함께 했던 장모님이기에 식사를 챙겨드리고 대소변을 가려드리는 일 정도는 어쩌면 당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의 장모님은 편안히 돌아가셨어요. 가끔 요양원에서 제가 물었죠. ‘어머니 제가 누구예요.’ 그러면 어머니가 우영이 왔구나 하셨어요. 때로는 혼자 계실 때 절 찾을 때가 있습니다. 요양원 측에서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 가지요. 그러면 어머닌 절 보고 반가와 하시며 ‘아이고 나 밥주러 왔구나’ 하셨어요. 그런 장모님이 그립습니다. 이씨는 장모님이 이제는 하늘 나라로 올라가 편안히 사실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며 마를 새 없는 눈물을 계속 닦아 냈다. <박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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