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고 느렸지만 법은 33년만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형님의 명예를 찾아주었습니다.”
1973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받다 의문사한 고 최종길 서울 법대 교수의 동생인 최종선씨(59, 버지니아 거주)는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서울고법은 최근 최 교수 유족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청구권 시효가 지났다는 국가의 항변을 배척하고, 18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앞서 2002년 5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최 교수의 죽음을 위법한 공권력의 개입에 의한 것으로 인정한데 이어 33년만의 완전한 역사적 복권이다.
최종선씨는 “군사정권 아래서 숨죽여 살아오며 진상을 세상에 전하려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며 “고통을 인내하면서도 진실을 향한 의지를 놓지않은 형수님과 조카들에 경의를 표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1962년부터 서울대에서 강의해온 고 최종길 교수는 1973년 유럽간첩단 수사협조를 위해 중앙정보부에 자진출두했다 3일 뒤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 때 중정은 “간첩혐의를 자백한 뒤 양심의 가책을 느껴 7층에서 투신자살했다” 고 발표했다.
최종선씨는 형의 죽음을 유신선포에 따른 대규모 시위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민심이 이반하자 간첩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중정이 저지른 ‘실수’라고 주장해왔다. 당시 최 교수는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연행되자 교수회의에서 학생들을 옹호하면서 당국에 대한 교수진의 항의표시를 제안하는 등 유신정권의 미운 털이 박힌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이듬해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고문치사 의혹을 제기했으나 폭압적 유신정권 하에서 진실은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유족들의 투지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당시 공교롭게도 중정 감찰실에 근무했던 최씨는 형의 죽음을 막지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정신병원에 위장 입원하면서까지 진상을 추적했다. 목숨을 건 그의 노력 끝에 기록된 양심수기는 훗날 형의 의문사의 진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됐다. 그의 양심수기는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보관돼 있다.
조국에 절망한 최씨는 1994년 미국행을 택했다. 버지니아에서 부동산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2001년에는 ‘산자여 말하라’란 책을 펴내며 의문사의 진상을 파헤치는 노력에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5년만에 정부의 복권에 이어 다시 법의 복권이 이뤄진데 대해 그는 “이제서야 형님이 역사의 제자리로 온전히 돌아왔다”며 “이는 모국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종선씨와 지인들은 오는 18일(토) 저녁 7시 애난데일 펠리스 레스토랑에서 고 최종길 교수의 명예회복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모임을 갖는다. 문의 703-989-4523.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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