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사랑하는 아들 시몬, 그리고 유진. 분홍빛 매화가 만발한 춘삼월이다. 오늘처럼 밝고 환한 날이면 비를 들고 너희들이 떠난 빈방의 먼지를 말끔히 털어 낸다. 네 엄마도 너희들이 언제든 되돌아와 쉴 수 있도록 침구를 갈고 책장들을 구석구석 닦는다.
솔개 같은 아들들아. 이젠 청년으로 커서 제 할 일을 성실히 이뤄내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어린 너희들을 끌어안고 낯선 객지를 전전하며 살아온 지난 20여 년의 힘겨웠던 세월. 이제 등으로 찬바람 부는 나이가 되어 되돌아보니 그 길이 행복의 별이 지나간 흔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시몬. 네 옛 책장에서 한국 전래 동화집을 꺼내든다. 교회학교 연극준비를 위해 밑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외웠던 동화들을 들여다본다. 이곳에서 태어난 네가 혀 꼬부라진 억양으로 처음 한글로 외웠던 토끼와 거북 이야기 - 빠르지만 게으르고 제 꾀에 넘어간 토끼와 느린 대신 끈기 있고 착한 거북이야기 기억하지?
네가 열살 쯤 되었을까? 유난히 영특하고 매사에 열심이던 너는 다섯 살 터울의 작고 숫기 없던 동생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었지. 아빠, 나는 토끼처럼 빠르고 동생은 거북이처럼 느리긴 해요. 하지만 토끼가 거북일 업고 같이 일등 하면 안돼요? 하고 진지하게 묻던 네 눈망울이 눈에 선하다. 아들들아. 아빠가 얼마 전 어느 책에서 본 토끼이야기 한번 들어보겠니?
「옛날에 거북이를 사랑한 토끼가 있었습니다. 토끼는 혼자 속으로만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도 토끼가 거북이를 사랑하는 줄 몰랐고, 거북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토끼에게는 한가지 아픔이 있었습니다. 거북이가 자기의 느린 걸음 때문에 매사에 자신이 없어하는 것이었습니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아, 우리 달리기 해보지 않으련? 그날 따라 거북이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그래 해보자. 드디어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토끼는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따라오는 거북이만 생각했습니다. 포기하면 어떡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주자.
그런데 눈을 뜨고 거북이를 쳐다보면서 기다리면 거북이가 자존심이 상할까봐 토끼는 길에 누워서 자는 척 했습니다. 거북이가 가까이 와서 자기를 깨워주고 나란히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옆으로 지나가면서도 자기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자는 척하던 토끼는 눈물이 났습니다.
결국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경주가 끝난 후, 동네 동물 식구들과 후세 사람에게 거북이는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거북이의 기쁨이 자기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몬과 유진아. 사랑이 무엇일까? 과시하지 않고, 양보하며 소리 없이 헌신하는 마음이랄까? 내가 무너져도 사랑하는 대상이 높아지면 한없이 기쁘고 흐뭇한 마음. 그게 사랑의 모습이겠지? 어려서부터 대학을 나올 때까지 항상 동생을 세워주고 보살펴준 맏형으로서의 너의 토끼 같은 숨은 사랑이 고맙다.
그러나 이젠 동생 유진이가 너를 앞에서 끌어주는 토끼가 된 게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신참이긴 하지만 투자회사의 전문인이 되어 아직 학생신세나 다름없는 형의 공부 빚을 쥐꼬리만한 제 봉급을 떼어 갚아주고 있다니 참 대견한 일이다. 형제간에 일방적 사랑이 아닌 서로 나누는 사랑으로 사는 게 고맙다.
인생 길에 우리의 처지가 토끼와 거북이 사이에서 수시로 뒤바뀌어도 함께 손잡고 결승골로 나아가려는 마음만 있으면 언젠가는 행복의 별에 닿을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그러나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옛말 속에 사랑의 삶을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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