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옥 <자영업>
그러니까 아버지처럼은 살아내야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남동생의 전화를 받은 것이 바로 2년 전의 이맘때였다. 아! 가셔 버렸구나. 한 번만 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뵙고 싶었는데.....그 때 소식을 받고 맨 먼저 내 가슴에 새겨진 것이 아쉬움이었다. 끄집어 낼 길이 없어 아직도 가시처럼 박혀 있다. 운명을 달리 한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같은 배를 타기 전까지는 어차피 등을 돌리고 걷는 것과 같아 아무리 그리워도 ‘다시 한 번만 더’가 없다.
생김새는 엄마를 빼 닮았지만 난 확실히 아버지의 딸이었다. 치과 시설이 없던 시골에서 이웃마을 아저씨네 가서 썩어서 쾅쾅 쑤시는 아픈 이를 장도리로 뽑아내는 대 작업을 해 낼 때 내가 붙들었던 손도 아버지의 손이었고, 서울로 전학을 와서는 시원찮은 성적표에 도둑 도장을 찍어 피멍이 들도록 맞은 손도 아버지의 두툼한 손이었다.
여섯 남매가 나란히 같이 자랐어도 어찌 보면 나는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다. 자식들의 장래를 위한다고 서울로 올라와 온갖 고생을 하며 자리를 잡으려고 애쓰시던 여름, 비오는 늦은 밤 우산을 들고 정거장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은 늘 내 몫이었다. 약국 형광등에 몸을 부딪치는 불나방들을 보며 버스를 한참 세다 보면 술이 거나하게 취하신 아버지가 오시는데,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뽀뽀부터 해 주셨다. 그리고 손을 잡고 돌아오는 길은 어김없이 아버지의 인생 세미나가 열렸다.
12살 짜리 딸에게 아버지의 인생세미나는 보약이 되었다. 곧고 우직하신 아버지의 인생철학이 쏟아져 나왔다. 성실과 정직이라는 마루 벽에 붙어있는 까만 비로드에 새겨진 글자의 참 의미가 무엇이며 인내의 바른 뜻, 효도는 왜 해야하는지.....매일 아침 우리에게 쓰고 외우게 하셨던 아버지의 그 마음도 나는 웬지 알 것 같은 심정이었다. 오늘도 아버지는 너무나 많은 서울 사람들을 만나시고 너무나 여러 번의 거절을 당하시고 돌아오실 것을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보약의 효과는 느리다 했던가. 아버지가 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주신 세미나의 효력이 나는 것 같다. 아버지의 그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를 붙들어 서게 하셨던 내 아버지의 그 ‘성실과 정직’이 지금 내 마음속에서 힘을 받는다. 아버지처럼은 살아내야지.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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