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당시 총격을 당했던 자리에서 박수영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박씨의 왼쪽 목에 총알과 수술자국이 선명하다. <신효섭 기자>
“약탈에 맞서 이틀간 사투
정치력 키워야 재발 막아”
1992년 4월29일. 어른들이 수 십 년 동안 맨 손으로 일궈 낸 삶의 터전이 눈 깜짝할 사이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던 22세 청년의 피는 TV만 지켜보고 있기에는 너무나 뜨거웠다.
위험하다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폭도의 약탈에 맞서 한인타운을 지켰던 박수영씨. 경찰이 떠난 무법천지에서 이틀째 사투를 벌이던 박씨는 4월30일 오후 10시께 3가와 호바트 구 원산면옥 자리에서 서로를 폭도로 착각한 한인간의 오인사격에 목 부위에 중상을 입고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으로 실려갔다.
3일 뒤인 5월2일. 한인타운은 평화를 되찾았고, 대수술을 받은 박씨도 의식을 회복했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총상을 입었던 후배 고 이재성군은 결국 구급차가 도착하지 않아 짧은 생을 마감한 뒤였다.
14년의 세월은 피 끓던 청년 박수영씨를 36세의 어엿한 사회인으로 바꿔놓았다. 박씨는 “나에게도 조금씩 잊혀져 가는데, 폭동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는 당연히 과거 속의 사건일 뿐일 것”이라면서 그동안 마음속에 간직해 온 4.29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폭동을 통해 한인사회의 가장 좋은 점과 가장 나쁜 점을 모두 봤다는 박씨.
폭동당시 몇몇 한인들이 보여준 희생정신은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있지만, 폭동 이후 성금배분을 놓고 감투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폭동이 발생하면 다시는 바보 같이 다른 사람을 돕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그는 “당시 많은 업주들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의 업소가 약탈을 당하고 있다고 떠들었는데, 대부분 현장에 가보면 업주도 없고 폭도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며 일부 업주들의 행태에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부상 후유증으로 1년 동안 아무 일도 못했지만 사지가 말짱하고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다는 박씨는 4.29가 장기적으로는 한인사회 발전에 도움을 줄 것으로 믿고 있다. “그 날 이후 많은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다. 4월29일은 한인 역사상 가장 슬픈 날이지만, 언젠가 다가올 한인사회의 가장 기쁜 날의 밑거름이 됐다고 확신한다.”
다운타운 뷰티서플라이 업소에서 라티노 직원을 관리하고, 흑인 고객을 상대하는 매니저로 일하는 박씨는 한인 정치력 향상의 중요성도 피력했다.
그는 “흑인과 라티노의 갈등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4.29때 흑백 갈등을 한흑 갈등으로 몰고 간 백인 중심의 주류사회와 언론이 갈등이 폭발하면 또 다시 한인을 표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투표도 열심히 하고 다방면으로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래도 한인 사회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가 한인사회와 4.29에 무관심한 건 사실이지만, 부모들의 눈물을 보고 자란 1.5세와 2세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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