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핀 체조의 꿈 태권도로 활활
경찰관 되어 ‘성공시대’ 열어가는
나디아 코마네치. 열네살 때인 1976년 몬트리얼올림픽에서 사상최초 10점만점 황홀연기로 조국 루마니아에 금메달 다섯 은메달 셋을 안긴 체조요정. 지금은 미국시민이 된 코마네치는 UC버클리 언저리동네 레이철 소녀에게도 꿈을 심어줬다. 레이철이 그랬듯이 체조는 그 즈음 소녀들의 유행병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초, 얼추 코마네치 나이인 열세살이 되도록 레이철의 꿈은 꿈에 머물렀다. 그때였다.
“얘야, 태권도를 해봐. 넌 잘 할거야. 할 수 있어.”
아빠엄마와 친하고, 그래서 레이철에게도 잘 대해줬던 UC버클리 민경호 박사(국제무도연구소장)의 권유였다. 부모도 찬성. 체조로 다듬어진 유연성에 태권파워가 실리면서 레이철의 실력은 성큼성큼 뛰었다. 로컬이벤트는 물론이고 UC오픈, 전미선수권, 팬암대회, 월드챔피언십 등 각종 대회에서 그는 못다핀 체조메달의 아쉬움을 태권메달로 메워나갔다. 80년대 중반 한국에 갔을 땐 ‘태권종가 한국낭자들도 겁내는 US 태권소녀’로 TV출연 등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덫이 있었다. 태권도의 88올림픽 시범종목 채택으로 미국을 대표해 올림픽 링에 오르는 꿈에 부푼 그는 검은띠를 더욱 힘껏 졸라맸으나 그것이 되레 화를 불렀다. 오른무릎 연골파열. 올림픽 링 대신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고단자 꿈마저 접어야 했다. 아직도 초단.
그렇다고 그의 태권정신까지 짓밟지는 못했다. UC버클리를 졸업뒤에도 아픈 무릎을 얼러가며 태권수련을 계속했다. 90년대 초 유럽 배낭여행 때, 북부프랑스에서 밤길을 걷다 뒤에서 덮친 치한을 보기좋게 격퇴시키기도 한 레이철의 태권지론은 스승 민 박사의 그것을 빼닮았다. “호신술이나 물리적 파워가 좋아지는 것도 있지만 태권도의 매력은 스스로 절제하는 능력과 건전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굳건히 해준다는 것이지요. “
태권도와의 만남은 결국 90년대 중반 경찰투신의 밑거름이 됐다. 오클랜드경찰국 성폭행전담반을 거쳐 오클랜드-샌리앤드로 인접지역담당 도로순찰대 소속이 된 지금, 그는 5피트3인치/100파운드의 작은 몸으로 풋볼선수 같은 거한들이 포함된 남녀경관 예닐곱명을 지휘하랴, 동료경찰 남편(제프 반 슬라텐)과 근무시간이 상당부분 엇갈려 ‘따로 또 같이’ 세 자녀(네살배기 맏아들 에이든, 첫돌 지난 쌍둥이딸 키라와 헤일리)를 돌보랴 바쁜 가운데, 지난 3월에는 중견간부인 사전트로 승진해 남편과 동격이 됐다.
아기를 돌보면서, 토요근무를 하면서, 2차례 인터뷰에 응한 그는 나중에 전화를 걸어 민원 한꼭지를 내밀었다. “기사 쓸 때, 태권도를 만나게 해준 민 박사님께 감사드린다는 말, 그리고 우리 경찰은 항상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한다는 말을 꼭 넣어주세요.”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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