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돈을 그냥 부쳤으니 분실될 수도 있고 또 누가 훔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래서 내가 무책임해다는 것이었다. 그때 시간은 4 시였다. 나는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철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처음엔 침목을 하나씩 넘다가 나중엔 두 개씩 건너뛰었다. 나의 맨발이 침목에 착착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체국에 가닿으니까 직원이 문을 막 닫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우체부들이 우편배낭을 동여매고 있는 데로 가서 창문을 두드렸다.
어투가 단호한 여자우체국장이 나를 알아보고는 내가 부친 편지를 찾아내어 수수료도 안 받고 우편환을 찍어주었다. 마음은 놓였으나 몸이 녹초가 된 나는 느린 걸음으로 집에 돌아갔다.1943-45년은 우리 집안에 매우 유익한 기간이었다. 2년여에 걸친 라우할라 직조업이 잘 풀렸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2차 대전이 끝났다고 했다. 우리는 신바람이 났다. 여름철이었는데 그때 우리는 작업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열세 살이 채 못 되던 나는 철없는 마음에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게 다 잘 되는 줄 알고 “그럼 이제 라우할라 짜기는 그만해도 되겠네!”라고 무심코 내뱉듯 말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윤성이가 내쏘는 말에 나는 입이 막혔다. “야, 멍청아.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그러면서 나를 게으름뱅이라고 불렀다. 그건 틀린 말이었다.
1945년에 제 2차 대전이 끝난 다음 우리의 라우할라 제품을 사가던 공씨는 이 고장에서 하던 사업을 그만두었다. 스가와라씨네는 우리를 사까모도씨라고 라우할라 제품을 만드는 다른 분에게 소개해주었다. 그의 근거지는 호놀룰루였는데, 우리가 사는 섬으로 빈번히 오곤 했다. 중년 나이에 성품이 친절한 사까모도씨는 사업 감각이 예민했다.
그는 상업방식이 남과 달라서,우리를 유쾌하고 지긋하게 대해주면서 관계를 이어갔다. 우리는 만든 물건을 상자에 넣어 그분한테 우송했다. 식탁매트와 폭이 12인치에 기다란 표백된 라우할라 매트는 수요가 많았다. 우리가 보낸 물건들은 사까모도씨네 상점에서 일단 다양한 크기로 절단해서 안감, 지퍼, 손잡이 및 제품안내표를 바느질로 부착했다.
그렇게 해서 지갑, 핸드백, 바스킷 등 예쁜 완제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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