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이라고 하기에는 낯간지러운 약간의 경사로 둔덕진, 그래도 맨 위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 작은 언덕 아래, 집 뒤 작은 정원에 한그루의 배(梨)나무가 있다.
아침이슬이 사라지지 않은 이른 아침, 배나무를 들여다보기 위해 언덕을 내려간다. 내 운동화 발길이 스칠 때 마다 톡톡 애벌레에서 갓 깨어난 여치와 메뚜기들이 날개짓을 하고 잠자던 모기가 선잠 깨웠다고 나를 쏜다. 정원 한 구석에서 땅벌, 나방도 기지개를 켠다.
중추가절(仲秋佳節)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다.
배나무에 100개 가까이 주렁주렁 열렸던 열매가 이런저런 사연으로 줄어들고 나중에는 칩 멍크 다람쥐에게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선물로 강요당하고 이제 겨우 3개만 남았다.
배를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필사적인(?) 방법을 동원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미국 올 때 이모님께서 만들어주신 코발트색 나일론 망사를 씌워 두었지만 어느새 벌이 먼저 냄새를 맡고 입을 대니 별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또 하나 따 먹었고.
오늘도 또 하나 따게 되었다. 가을 수확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게 자란 배, 크기, 색깔, 맛, 삼위일체로 흠 잡을 것 없던 특상의 배.
나의 정성 부족으로 잘 자라지 못하고 기품까지 없어졌다. 몇 해째 계속 다람쥐에게 도둑맞고 금년에는 추석 제사상에 올리리라 잔뜩 기대하며 매일매일 배나무 밑에서 서성이며 망사 속을 들여다보곤 했는데…
둥글고 아주 예쁘게 자라던 배가 어느 날부터 균형을 잃어가며 삐뚤어지게 자라고 있다.
이쪽저쪽 돌려 살펴보니 배나무 잎으로 가려져 있던 쪽에 신생아 발 뒷꿈치로 꼭 누른 듯 햇밤색으로 변색해 버린 앙증맞은 반점을 발견했다.
더 이상 나무에 매달려 있을 이유가 없다. 혹시 상처 생길까 빳빳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진 코발트색 나일론 망사 끝을 주머니처럼 모아 노끈으로 질끈 묶어 놓았던 것 풀어버리고 배를 살살 돌리니 가위의 힘 빌릴 것도 없이 손안에 쉽게 떨어진다.
어쩌면! 대자연의 유감없이 발휘된 이 우주의 외적 다양성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하늘하늘 가냘픈 사국(糸菊) 황금색으로, 명주 결 보다 곱고 엷은 배 껍질을 한지(韓紙)삼아 대원군의 석란(石蘭)이 여러 폭 그려져 있지 않은가. 가을갈대와 심지어 솜사탕 구름까지.
배의 목이 길고 몸통이 크지 못하였으니 바람에 쉽게 돌아가 몸통 전체에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산들 바람이 석란을, 세차게 몰아붙이는 비바람이 뭉게구름을, 안개비가 촉촉이 내릴 때면 갈대숲을, 나일론 망사를 붓 삼아 대자연이 가을정취를 배 전체에 입체감 있게 그려낸 것이리라.
참으로 정직한 대자연을 보며 인간의 오만은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학력위조 논란에 이은 청와대 고위공직자와 한 여인의 스캔들이 나라 전체를 흔들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의 인격 즉 내면의 다양성이, 수용능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사람을 속이고 자신도 속이고 권력을 이용 또는 남용하고 필요 이상의 액세서리 주렁주렁 달면 무거워 쓰러진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연이나 거짓이 없는 대자연이기에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서사시를 그림으로 탄생시킨 배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겨본다.
이제 달랑 한 개 남은 배. 며칠 후면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 8월 한가위.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조상을 섬기는 나의 깊은 뜻을 헤아리시고 혼신의 힘으로 버티어 주실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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