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추수감사절은 11월 22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11월을 ‘감사의 달’이라고도 한다.
뒤돌아보면 지난 1년 질고, 환란, 역경과 시련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은총 속에서 살아왔다. 건강도 지켜주시고 자녀들을 축복하시며 경제적 불황 속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혼탁한 사회 속에서 은퇴 후 에도 여전히 신앙생활 잘 하며 살아오게 해주셨다. “여호와께서 내게 베푸신 그 크신 은혜,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구원의 잔을 들고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다”는 시편 저자의 노래처럼 그런 노래를 소리 내어 나도 부르고 싶다.
사람 중에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있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런 말을 흔히 듣는다. 사람이 원수는 잊지 않고 갚으려고 하면서 은혜는 갚으려는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것 같다. 원한은 마음속에 깊이깊이 새기지만 은혜는 세월의 강물 위에 가볍게 띄워 보내고 쉽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받은 그 은혜를 입어버리거나 갚지 않을 때 그런 부류의 사람을 가리켜 사람의 허물은 썼으나 인간으로서 본질을 갖추지 못한 빈껍데기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솝의 우화엔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장마철 홍수로 인해 겨우 풀잎을 잡아타고 강물 위로 정처 없이 떠내려가던 개미는 비둘기의 도움을 받아 구출되어 살아났다. 개미는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하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혜 갚을 길이 없었다. 두 해가 지난 봄날이 왔는데도 은혜를 잊지 않고 있던 그 어느 날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다보니 포수가 총을 겨누고 방금 무엇을 쏘아 잡으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나무 위에 앉아있는 비둘기였다. 비둘기는 나뭇잎 뒤에 숨은 포수를 보지 못해 마음 놓고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개미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여보세요, 비둘기님. 위험해요, 빨리 피하세요”하고 소리 소리를 질렀으나 원체 작은 개미 소리가 비둘기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러자 생각다 못해 개미는 포수에게 사력을 다해 기어가 발뒤꿈치를 깨물었다. “어이쿠,” 발뒤꿈치를 물린 포수는 얼떨결에 총을 헛쏘고 말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은 개미,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인가. 그래서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인간을 가리켜 미물(개미)만도 못한 존재라고 하는 모양이다.
감사할 줄 알아야겠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할 줄도 알아야겠더라. 살아보니 감사와 불만은 현재의 상황만을 갖고 판단하며 조급하게 할 것이 아니라 미래의 결과를 보고 말해야할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요한 웨슬레는 감사하는 자를 가리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다. 감사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뭐니 뭐니 해도 아직 어린아이와 같이 미성숙한 성도이다.
감사해야할 때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종의 도덕적 장애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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