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말이 있다. 오랜 타향살이에서 사향에 절은 나그네가 간절한 고향의 인정을 그리워하는 말로 안다.
지난 8월 23일 오후 애난데일에서 워싱턴 문인회가 주최한 ‘문화인의 밤’ 행사가 있었다.
이날 첫 번째 순서로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저자인 김현식 교수의 ‘북한 문학의 현주소’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간추린 강연 요지는 북한은 김일성을 하나님, 김정일은 예수, 그리고 당을 성령으로 우상화한 삼위일체를 강요하는 사이비 종교 국가이며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 모든 예술도 창작활동에 자유가 없으며 오로지 당의 요청에 의해 정권 장악을 위한 ‘종자론(씨론)’적 통치수단에서만 만들어 진다고 했다.
김 교수는 평양사범대학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바로 동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38년간 봉직하며 김일성 처가 자녀들의 가정교사 등, 북한의 최고 엘리트 군에서 생활하다가 1992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인사이다. 이 후 10여 년간 탈북자로 서울에 머물면서 경남대학교, 한국 외국어대학교, 국가정보대학 등 교수 및 통일 정책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가 미국 뉴올리언스 신학대학원, 예일대학 초빙교수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버지니아 조지 메이슨대학 연구교수로 있다. 또한 워싱턴의 북조선연구학회 대표로 있다.
나는 이날 이 행사에 참석했다가 정말 반갑고 기뻤다. 60년 만에 고향 까마귀를 만났다. 김 교수의 강의 중에 동향인인 줄 알았다.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행사 후 좌담회 시간에 나는 김 교수와 독대했다. 우리는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가 고향인 동향인이며 같은 시기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 1946년 3월 13일 북한 공산정권의 총칼 앞에 항거한 역사의 함흥학생사건 때도 함께 의거 했었다. 그 후 1947년에 나는 혈혈단신 38선을 넘어 자유인이 되었다. 이후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김 교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으로 서로 다른 사상환경에서 분단의 아픔 속에 살아왔다.
어떤 통로로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미국 땅 버지니아에서 감격의 만남을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의 대화였지만 우리는 함께 그리운 고향을 가 볼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고향의 정경을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었다. 나도 21세기의 유목민이다. 그 동안 나도 삶의 많은 고난의 터널을 지나왔지만 김 교수는 유별난 공산독재 치하에서 더 힘든 과정과 생사의 기로에서 생의 끝자락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음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6.25 전쟁 때는 인민군과 국방군으로 서로 다른 체제에 보국충성으로 군인의 본분을 다하다가 각기 적군의 포화에 맞아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일도 거의 같은 운명인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 최전방에서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지 않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며 웃었다.
아쉽지만 우리는 또 서로 연락을 약속하고 행사장을 떠나왔다. 아! 정말 60년 만에 고향의 까마귀를 만난 기쁨 감개무량했다. 나는 김현식 교수의 오랜 고난으로 망가진 몸의 건강과 연구하는 일과 계획하는 일들이 하나님 은혜 가운데 형통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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