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성이 눈물이 흔한 사람이다. 동양 문화권에서 잔뼈가 굵은 몸이 눈물을 자주 흘린다는 것은 대장부의 기개가 없고 정신적으로는 나약한 존재라 할 것이다. 예부터 내려오는 유교적 가르침은 희비애락을 얼굴에 나타냄은 선비의 몸가짐이 아니라 하였다. 그러나 그 유교의 시조인 성인 공자도 자기의 대를 이어갈 수제자인 안회(顔回)가 요절함에 하늘이 나를 망쳤도다 하고 한탄하며 대성통곡 하였다고 전하여 진다.
공자가 간지 500년, 사람의 몸을 하고 이 세상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 깊은 마리아로 부터 자기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도 울음을 터뜨렸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그의 복음서(11:35)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Jesus wept)”라고 적어 놓았으니 비록 단 두개의 낱말로 된 짤막한 문장이지만 매우 신령한 영적 감동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 사실은 신구약을 통해 제일 짧은 성경구절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분노의 분출도 가히 폭발적이어서 그가 유월절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성에 돌아와 보니 성전은 온통 장터로 변해 잡상인들로 들끓고 있는 것을 본 예수는 비둘기통을 부수고 비둘기 떼를 모두 날려 보내 놓기 까지 하는 대활극을 벌였으니 하나님은 그를 이 세상에 내보내실 때 하이퍼 성격에다 다혈질 체질의 인간으로 만드신 것이 아닌가 추측이 간다.
지난 봄 나는 아내를 하늘 나라로 보내면서 많이 우는 가운데 울음에도 에티켓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흘리는 눈물은 동정의 대상은 되겠지만 제 삼자에게는 별로 큰 의의가 없다는 것이다. 감정에 복받쳐 지나치게 울먹이고 말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냉철한 자기 관리가 필요할 때다. 울음은 웃음도 마찬가지지만 그저 우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모나리자의 웃음이나 삼성 갤러리에 걸려 있는 ‘눈물 흘리는 여인’ 상을 보고 있으면 신비감마저 돈다. 가슴속 깊은 곳에 사무쳐 있는 눈물의 사연을 망설여 억측할 뿐이다.
눈물에는 악어가 흘렸던 위선의 눈물이 있는가 하면 가이없는 여자의 눈물이 나라를 망쳤고 명나라의 한 소저(처녀)가 흘린 눈물은 조선왕조를 파멸에서 건저 낸 일화도 있다.
남자의 눈물과 여자의 눈물에는 비중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눈물과 웃음은 마치 청실과 홍실이 연직과 가로실로 맺어져 아름다운 비단 천을 엮어 나가듯 슬픔도 즐거움도 서로 엇바꾸어 가며 자칫 메말라가는 우리들 인생 항로에 단비를 내리기도 하고 화창한 봄날 따스한 햇빛 되어 우리의 얼은 가슴을 녹여주기도 한다.
웃음과 울음이 없는 인간사회는 얼마나 삭막 할까 상상하여 본다. 우주인의 세계라 할까. 순식간에 눈물을 쏟아 내게 하기도 하고 심기일변 가가대소(可可大笑)의 웃음 보따리를 펼쳐 놓기도 할 수 있는 창조주의 능력. 그 절대자의 심오한 섭리에 머리 숙여진다.
변만식
기윤실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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