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8일 미명, 진주만 선제공격으로 미일 전쟁에 돌입한 일본은 승승장구 화려한 서전을 장식, 순식간에 동남아 전역을 완전 장악하는 듯 한 기세였다.
압박과 착취의 서구 세력을 아시아에서 몰아내고 대동아 공영권을 구축, 동양평화를 이룩하겠다는 미명 아래 시작한 전쟁은 동경대학 경제학부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 일부 반전 좌경 지식인을 제외한 대부분 국민의 열띤 호응을 얻어 내어 인도네시아 일원의 에너지 자원 확보라는 숨은 야욕도 무난히 채워지리란 전망이었다. 허나, 개전 후 얼마 아니하여 일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월등한 군사력과 생산력을 보유한 미·영군의 맹 역공에 부딪치게 된다.
근·현대전에 있어서 승패를 가름할 제공권을 미군이 쉽사리 장악함에 따라 한때 무적을 자랑하던 연합 함대도 처참히 침몰, 본토의 초토화도 시간 문제요, 겁 없이 저지른 전쟁이 불원패망으로 종식되리라 예견되던 1943년, 일본 정부는 전시 특별 조치의 일환으로 학도동원령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일인 학생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는데 조선인 학생을 남겨 공부하게 하겠는가? 곧 뒤따라 조선인 학생에게는 조선 총독령으로 반도 출신 학도지원병이란 가증스러운 이름으로 강제 징집하기에 이른다. 재학 중은 물론 육 개월 단축된 졸업생도 이에 포함된다.
지원이란 말뿐 혹독한 강제로 피할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나의 경우는 내 은신처를 찾아내기 위해 나의 부친을 압박하였는데 미국 북 장로교단의 지원 아래 운영되던 평북 선천에 자리한 신성학교의 미국 선교사 교장이 강제 출국됨에 따라 그 학교가 재정적으로 어렵게 되어 선천의 명문 오씨 일가와 함께 아버지도 동참, 당시로써는 거액이라 할 삼 만원(나의 장인이 군수였던 당시의 월급이 이백원)을 기부한 사실 등으로 인해 친미 성향의 불온사상 보유란 혐의로 불려가 심문 당하고 사업체에 대한 세무 조사로 괴롭힘을 당해 결국 서맹하게 된다.
서맹 후 입대까지 남은 시간도 있어 부모님의 배려로 각 도의 명승지를 탐방하기로 하여 경주, 진주, 목포, 부여, 개성 등지를 찾았다. 주유천하하는 옛 선비처럼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입대하기 전 연성회란 예비 훈련기간이 경성대학 법학부와 동성상고 두 곳에서 있었는데 나는 법학부에서 받았다.
훈련 기간이 끝나는 날 부민관에서 장행회란 것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일화를 이에 적으려 한다.
육군 대장의 정장군복으로 등단한 총독 고이소의 개구일번이 “제군이여! 나라를 위한 충성의 소리가 팽배한 이 광경을 무엇으로 보는가? 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다!”라고 하자 이층에서 병력 같은 고함 소리로 장내를 뒤 흔들며 한 학병이 말하기를, “총독이여! 우리가 이제 전쟁터에 나아갈 터인데 총독은 우리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겠는가?”라고 하자 총독은 한 순간 숨을 고르는 듯하다가 “나 총독은 조선 민중의 안녕을 위해 전념할 것이니 안심하고 천황 폐하를 위해 충성을 다하기 바란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회장은 한참 술렁이었고 열혈한 그 청년 학병은 즉시 사복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 청년이 작가 이병주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작가 한운사라는 설도 있다. 하여튼 이 일로 일본이 그토록 집요하게 우리는 동조동근이라면서 황민 동화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음을 보였고, 조선의 젊은이가 아직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여실히 나타낸 증좌라 생각되어 자랑스럽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입대하기 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은 후 300명으로 추산되는 우리 학병은 몹시도 추운 1944년 1월 20일 평양 42부대에 입대했다.
어떤 이는 부모님과 어떤 이는 사랑하는 애인 또는 아내와 작별하는데 나는 망연의 표정 없는 모습으로 돌아서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마도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려 하였으리라.
<계속>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