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 첫 날 밤을 뜬 눈으로 보낸 다음 날로 기억되는데 취침 전 점호 시간에 내무반의 고참인 상등병이 난데없이 내 앞에 다가와 신고 있던 실내화(군화로 개조된 것)로 나의 왼쪽 뺨을 후려갈기면서 하는 말이, “너! 조선인이면서 건방지다”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나는 둘째 날 밤도 뜬 눈으로 보내야만 했다. 지금의 조기 난청 장애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부대는 남방과 라바울 섬에서 철수한 자들로 이루어진 악명 높은 부대라고 자찬하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이 부대에서 20일간 머무르다 일본군 중지파견 제13군 예하보대로 편입되어 중국 대륙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목적지는 북경과 남경과의 중간지점이며 교통의 요충지인 서주였다. 서주는 중국의 주력 정예부대인 제9로 군과의 판세를 가르는 대회전이 있었던 격전지였는데 초토화되다시피 한 상흔이 말끔히 가신 신시가지로 변모되었고, 우리의 첫 임무는 비행장 경비였다. 전쟁터에서의 초년병은 훈련 중에도 전시 근무를 병행하는 것이 예사다. 약 1개 월 간의 복무를 마친 후 조선인 학병들은 각 부대로 분산 근무케 하는데 나는 서주 근방 수양이란 소성시 소재 마쯔가와 대대에 편입되었다.
내가 속한 1중대 1소대엔 나와 두 학병이 있었는데 이일용과 노희필이다.
우리 셋은 저녁 자유시간이면 부대병사(병사라야 중국 성황당 건물) 뒤뜰에 있는 우물가에 모여 탈출을 궁리하게 된다. 평양에 입대하기 3일 전 저녁에 한경직 목사가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 한 목사가 시무 하던 제이교회 김 장로의 손자 김호영, 유하영 목사 시무의 제일교회 정 장로의 아들 정근석과 안 장로의 막내아들 나, 이렇게 셋이 초대되었는데 눈물의 간절한 기도 후에 주신 말씀이, “보아 전쟁에 종군 기자로 취재차 참가한 윈스턴 처칠이 보아 병정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탈출, 귀국 후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라는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면 탈출하라는 메시지로 느껴진다며 탈출을 제의하니 동경제대 정치학과 출신의 이 군이 먼저 동의했고 이미 결혼해 아내를 고국에 둔 노 군은 한참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자기도 뜻을 같이 한다 하여 현대판 도원의 결의, 형제가 된 셈이다. 이 군은 나보다 4년 연장인 형님 격이고 일본제국대학 중 유일하게 정치학과가 있는 소위 아까몽 출신이다. 시국과 상해 임시정부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이 군은 76년 작고했으며 연길성 도서관 관장을 역임 했었다)
이렇게 3개월 후 나는 훈련 중 발에 큰 부상을 입었다. 오른 발 밑바닥에 철물이 박혔으나 방치한 채 며칠이 지난 후 심한 통증을 느껴 소대장에 알려 치료를 받게 되는데 절개 수술을 필요로 한다 하여 하는 수 없이 수술 후 텅 빈 내무반에서 꽤 오래 기거 하였다. 치료하는 동안 군의관인 사헤끼 중위와 친근해져 그의 주선과 전날 목포상고(일인과 조선인 반반인 공학제) 출신인 소대장 모리 소위의 추천으로 중대 정보실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나에게 내린 천혜의 회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의 친구들은 영외 훈련 중 주변의 지형지물을 구석구석 살피고 익히고 나는 안에서 주변 상황을 지도에 표시하는 일과 진중일기를 쓰는 일을 맡았으니 이런 고마움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정보실 근무를 하게 된 연유는 초년병에게 의무화 되어 있는 주말에 꼭 가족에게 보내는 군사우편 엽서의 덕이라 하겠다. 그럴 것이 엽서이므로 글 내용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 벽을 두드리고 어미 닭이 밖에서 껍데기를 쪼아 대어 마침내 귀여운 병아리가 탄생한다는 불가의성어를 생각하게 한다.
드디어 대망의 D-day를 맞이하게 된다. 택일도 셋이 모은 지혜였다. 달 없고 별만 반짝이는 야반 삼경 불침번 시간을 택한 것이다. 이 군이 먼저, 다음 나 그리고 노 군이 일어나 다음 순번에 가기 전 민첩하게 움직여야 했다. <계속>
안국두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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