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원수도 제법 많아졌고 교육훈련 내용도 충실하여 독자적 군사 행동을 감당할만한 실력을 갖추게 된 셈이다.
신사군과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축구, 농구, 시합도 여러 차례 했었다. 농구는 신사군이 우세했으나 축구는 우리가 언제나 승자였다.
중국에 있는 동안 우리들은 거의 다 가명을 쓰기로 하였는데 기억되는 대로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괄호 안은 가명.
엄영식(엄영호), 신상초(안정호), 심영순(최진호), 김웅(왕신호), 안국두(안허), 한명삼(이백), 방휘제(호정), 이일용(이일홍) 등.
일본의 패망이 눈 앞에 다가옴에 연안의 동맹지도부로부터 8월 29일 제3차 대표회의를 열기로 결정한 고로, 화중분맹대표 3명과 무정이 교장으로 있는 산서성 태행산 항일 근거지에 입교하기 위한 대부분의 학병이 함께 강소성 익림진을 떠나 북상도중 기로예군구(冀魯豫軍區) 소재지인 하남성 복양에서 감격의 8.15를 맞이하였고, 계속 북상하여 천진 부근 오전에서 태행산에서 내려온 학병군과 합류 간부대대를 편성한 후 동북 땅 선양에 도착하게 된다.
일행 중에는 유일한 중년신사 한 분이 있었는데 백범일지에 나오는 전 대성학교 교사 박진 선생이다.
우리 모두가 신사군 기지를 떠나 연안과 태행산을 향하기 몇일 전 그들은 우리들과의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해 성대한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는데 그 자리에는 임표 장군도 있어 우리들의 장도를 격려해주었다. 그는 한때 모(毛) 주석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실각, 모스크바로 향하는 비행기의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소련의 10월 혁명 전승 축하 행사에 참가 소련군 사령관의 사열을 받기도 하였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것은 역전 광장에 높이 세워진 전승 기념탑 위에 소련제 탱크가 포신을 동쪽을 향해 겨누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소련의 동방 정책을 확실히 나타내는 표적이라 여겨졌다.
선양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의용군은 4지대로 편성되었는데 나는 제5지대원으로 연변지구 조양천에 가게 되는데 혹한의 만주 땅을 가로질러 힘든 도보 행진을 잊을 수가 없다.
길림성에 들어서자 러시아에 능통한 인솔자가 현지 소련군 지휘관에 간청 화물차를 타는 행운을 잡는 듯했으나 돈화 역에 도착하자 마적단이란 거짓 밀고에 의해 강제 무장해제 당해 처참했던 일 역시 잊을 수 없다.
간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기다리는 임무는 현지 치안대와 함께 마적 떼를 합동토벌, 소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국에 가까웠고 우리 동포들이 많이 자리 잡고 사는 고장이라 인내를 갖고 귀국할 날만 기다리는데 그 날짜가 언제일지 알 수 없으며, 듣건대 이미 국내에 진주한 소련군 당국은 개인 자격은 허용하되 군대로서 행렬지어 입국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조국이 행방이 된 지금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 생각을 같이 한 친구들이 용정촌에 있는 문동환 목사의 도움으로 도문과 산삼봉 사이의 결빙된 두만강을 건너 꿈속에서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는다.
회령에서 1박을 한 후 1946년 1월 20일이었다. 평양 42부대에 입대한 1944년 1월 20일부터 꼭 2년 만에 환국한 것이니 기이한 인연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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