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차례상 차린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지만, 시절이 어렵고, 그러다보니 어려울 때마다 항상 뒤에서 응원해주셨던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도 3년째 접어들고 해서 서툴지만 차례를 지내고나니 한결 가벼운 마음이다.
그러고 보니 비로소 나 또한 살아있을 날이 한살 줄어들고, 살 날이 살아 온 날보다 줄어든 지 이미 오래고, 앞으로 만날 사람들 중에서 열에 예닐곱은 나보다 손아래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한층 나이 먹음에 대한 자세를 다시 가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엊그제 젊은 손님 한분과 가벼운 언쟁 중에 “나이도 어린분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했더니 되돌아 온 홍두께는 “나이 먹은 게 무슨 자랑”이란다. “하여간에 나이 먹은 사람들은...”하고 위 아래를 쳐다 보다가 말끝을 흐린다.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언쟁의 발단이야 차치하고라도 이런 상황은 그냥 연출된 것도 아니고,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실생활 때 곳을 막론하고 일어나는 소위 세대 간의 갈등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으나, 우선에 나부터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본의 아니게 오갔던 한마디씩에서 실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쪽은 당연히 내 쪽이었고, 조금 더 심해졌더라면 `보수꼴통’소리까지 안들은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키로 했다.
요즈음에 젊은층과 얘기할 기회들도 줄어들겠지만 나이든 쪽에서 분명히 알아둬야 할 것 중에 한 가지가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 가졌던 충효사상이나 장유유서 등 우월적 가치는 젊은 세대가 갖는 우선적 가치에 묻혀버린다는 사실이다. 그걸 잊고서 아무렇게나 대했다가는 영락없이 나처럼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 발언에 유념해 둘 필요가 더 하다.
가령, 해방 전후 세대가 어렴풋하게 겪었을 전쟁의 기억에다가 웃어른들의 참혹한 얘기들이 더해져서 좌익, 빨갱이 죽일 놈, 죽여 없애야 될 말종 쯤으로 생각하는 선대들의 이념 스펙트럼을 그대로 여과 없이 젊은 세대들에게 들이댄다면, 그들로부터 되돌아오는 건 지킬 것 만한 뚜렷한 명분마저 불분명한 분들이 무엇을 지키고자 ‘보수’를 자처하고, 굴종의 시대에 쩔어든 예속 노예근성마저 버리지 못하는 ‘꼴통’ 낙인까지 여지없이 덮어쓰게 되어 버린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약자에게 관심을 갖고, 약자들을 배려하며, 약자의 이익을 대변코자 하는 것에서 한발만 더 나아가 가진자와 권력자의 역할을 말할라치면 여지없이 좌빨이니 빨갱이니 무심코 내던지고, 단지 선험적 가치에 의존하여 젊은 세대들에게 침묵과 종용을 주입코자 한다면 인류 보편적가치인 ‘공동선’ 추구라는 젊은이들의 대명제 앞에 혹독한 시련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살면서 새로운 풍속도가 리플이라는 댓글 코너가 있어서 신문기사 하나하나마다에 개인의 생각들을 올려놓곤 하는데 역기능적인 면이 너무 많다는 지적에 반하여, 의미 있는 분석들도 눈여겨 볼만한 게 가끔 있다.
70년대 말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자를 접해 본 뒤로 받았던 정체성의 쇼크에 이어서 정치학도로서 신문기사의 숨어있는 글을 읽지 못한다면 정치학 공부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한국정치학계의 석학 고 주수원 교수님의 말씀이 오늘에 새롭다.
오늘날 언론의 문제이려니와 신문 제목만 달달 읽고 나서 빨갱이 운운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더 이상 늙은 사람들은 모두 보수꼴통이라는 말이 듣기 싫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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