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가 너무 지겹게 온다며 투덜대는 사람이 많다. 하긴, 지난 5월16일 이후 20여일째 거의 날마다 비가 내리고 있다. 하루에 거의 반 인치나 쏟아진 날도 있다. 5월 강우량이 예년보다 두 배 가까이 많은 2.83인치를 기록했단다.
그러나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한국의 세계적 팝스타 정지훈은 예명이 ‘비’다. 그의 ‘비의 도시 시애틀’ 공연을 기대할만 하다. 4년 전 이맘때 베나로야 홀에서 리사이틀을 가진 소프라노 조수미도 “비를 무척 좋아해서 시애틀에 가면 꼭 비를 맞을 줄 알고 좋아했는데, 오늘 따라 해가 쨍쨍해 섭섭하다”고 말했었다.
음악가 아닌 필자도 비가 싫지는 않다. 지금 생각하면 맨날 땡볕인 LA에서 어떻게 20여년이나 살았나 싶다. 이젠 비가 와도 토박이들처럼 우산을 쓰지 않는다. 비 때문에 주말등산을 거른 기억도 없다. 80년대 후반 1년 반가량 하와이에서 살 때는 거의 매일 무지개를 보는 행운을 누렸다. 그곳에도 비가 많이 오지만 대개 일과성 소나기이다.
시애틀의 비 얘기에 꼭 거론되는 ‘팩트’(사실)가 있다. 비가 많이 오는 것이 아니라 찔끔찔끔 자주 오거나(연간 158일) 구름 낀(연간 227일) 날이 많다는 점이다. 시애틀의 연평균 강우량은 36.2인치(92cm)로 전국 도시들 중 고작 44위이다. 물론 워싱턴주엔 올림픽 국립공원의 ‘호 우림(雨林)’처럼 연간 145인치(전국 2위)나 쏟아지는 곳도 있다.
도시별로도 호 우림 인근의 퀼라유트가 104.50인치로 전국 2위에 랭크됐다. 하와이의 힐로(128인치)가 1위, 오리건의 아스토리아(69.60인치)가 3위이다. 4위는 블루 캐년(캘리포니아, 67.87인치), 5위는 모빌(앨라배마), 6위는 탤라하시(플로리다), 7위는 펜사콜라(플로리다), 8위는 뉴올리언스(루이지애나), 9위는 웨스트 팜비치(플로리다), 10위는 마이애미(플로리다, 59.55인치)로, 이들 모두 자칭 ‘비의 도시’인 시애틀(36.2인치)을 압도한다.
하지만, 구름 낀 날은 시애틀(227일)이 4번째로 많다. 퀼라유트와 아스토리아가 공동 1위(240일)이고, 올림피아(229일)와 포틀랜드(223일)가 각각 3위와 5위에 올라 서북미 도시들이 1~5위를 석권했다. 거기에 칼리스펠(몬태나, 213일)이 6위, 유진(오리건, 209일)이 10위에 랭크돼 흐린 날이 많은 전국 10대 도시 중 7개가 서북미에 몰렸다.
우중충한 날씨는 우울증 환자뿐만 아니라 지성인들도 많이 만들어낸다. 시애틀과 날씨가 비슷한 독일은 자고로 철학, 문학, 음악 등 이른바 안방문화의 산실이다. 매리너스는 해마다 꼴찌를 맴돌지만 시애틀 시민들의 독서율은 해마다 전국 톱을 자랑한다.
필자는 ‘비’하면 정지훈이 아닌 황순원이 생각난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온 ‘소나기’ 때문이다. 시골소년과 서울서 전학 온 부잣집 손녀 사이의 로맨스(?)를 서정적으로 그린 단편이다. 함께 단풍구경 갔다가 소나기를 맞은 소녀가 열병으로 죽은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고 울음을 삼키며 망연자실한 소년의 모습에 어린 필자의 가슴이 퍽 아팠었다.
어른이 돼서 읽은 소머셋 모옴의 대표작 ‘비(Rain)’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남태평양 사모아 섬의 파고파고로 옮겨온 도시출신 창녀를 전도하려고 불철주야 애쓰던 강직한 유부남 선교사가 그녀의 성적 매력에 홀려 결국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인간의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비의 또 다른 면을 암시하는 듯 선교사가 창녀를 만나는 날은 항상 비가 내렸다.
시애틀의 비는 구질구질하지만은 않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톰 행크스는 비 때문이 아니라 사별한 아내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혹시 비 때문에 잠이 안 온다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우자. 어차피 시애틀 비는 주야장창 오지 않는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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