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농업학교 항일결사단체 ‘독서회’ 조직 반영균옹
삼일절 92주기를 앞두고 일제 강점기하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한인이 시카고에 생존해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슬이 시퍼런 일제의 칼날 앞에서 결사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 반영균옹(91)이 그 주인공이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해 12월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에서 태어난 반영균옹은 한의원을 함께 운영하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36년 춘천농업학교에 진학한 반옹은 모든 교과과정이 일본어로 진행되고 대부분의 교사가 일본인으로 구성된 학교의 교육 체계에 반감이 쌓이던 차에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항일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일제의 눈을 피해 학교를 마치고 뒷동산이나 친구들의 하숙집을 전전하며 항일운동을 모색했고 1937년 11월, 마침내 이준환, 김시묵, 김창경, 박기종 등과 함께 항일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했다. 40여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독서회는 민족의 교양서적인 ‘흙’, ‘상록수’,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의 도서를 구매해 나눠 보고 토론과 독후감을 통해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했다.
하지만 1940년 10월 졸업을 앞둔 회원들에게 서명을 남겨 건네준 태극기가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 독서회의 실체가 밝혀지게 되고 관련자들은 퇴학처분을 받거나 검거되는 등 파국을 맡게 된다. 이미 졸업했던 반영균옹 역시 주동자로 체포돼 1년 반이라는 세월을 춘천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지내다 1942년 10월 21일에야 자유의 몸이 된다.
반옹은 당시를 회상하며 “춘천농업학교는 당시 강원도 인근 각지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드는 명문학교였다. 독서회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발족했지만 곧 이어 관립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함께 참여해 일본인 교사의 민족적인 차별에 저항하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교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당시 결사목적과 행동강령을 마련했었는데 회원으로서의 자기완성, 지도자로서의 책임완수, 단결력 배양과 파벌투쟁의 배척, 조선민족을 위하여 일신을 바칠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고 설명했다.
옥고를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의 친구들과 함께 ‘대한독립 촉성청년회’ 강원지부를 조직해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학창시절 당시 독서회의 이념을 전달하는데 주력했고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인 ‘근화동우회’도 만들어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는데 전력을 다했다.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더 이상 독립운동의 필요성이 없게 되자 지역언론의 필요성을 깨닫고 남궁 태, 김우종, 백춘기 등과 함께 강원일보를 창간해 취재기자와 교정업무를 함께 보며 언론에 몸을 담게 된다.
그후 1944년 강원일보 서울총국장으로 부임했는데,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자 아내 정암자씨와 세자녀를 이끌고 청평으로 피난길을 떠나게 된다. 전쟁의 포화가 점차 줄어들고 마침내 휴전이 된 직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강원도청 농사원(현재의 농촌진흥원 역할) 소속 공무원으로서 지역 농업 활성화를 위해 전념하며 1963년 은퇴때까지 근무했다. 은퇴 후 춘천 인근에서 산장을 운영하던 반옹은 1980년 환갑을 맞이해 딸이 있던 시카고를 방문했다 현재까지 머무르고 있다.
반영균옹이 주도한 춘천농업학교의 비밀결사단체 독서회의 독립운동과 항일활동은 1980년 강원일보에서 발간한 태백항일사중 ‘춘농독서회창립회원’이라는 항목에 별도로 크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춘천농업학교(현 춘천농공고등학교)에서는 지난 1995년 교내에 5.4m 높이의 춘천농고 항일운동기념탑을 건립하고 반옹을 비롯한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 이름 등을 동판에 새겨 옥고를 겪었던 학생들을 위로하고 후진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 이 기념탑은 한국 독립기념관에서 운영하는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의 독립운동 유적지로 선정돼 있으며 반옹을 비롯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은 독립기념관에서 지난 200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도 소개돼 있다.
반영균옹은 “당시 그토록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왜 독립을 외쳤는지 요즘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희생과 아픔을 겪었는지, 우리 민족의 속마음이 어떠했는지는 당시를 살아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이라면서 “나라를 빼앗긴 설움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겪었지만 작은 힘이라도 모아 한마디로 사람구실을 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을 뿐이다. 따라서 누구에게 인정받거나 박수를 받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사는 ‘독서회’ 회원들이 이미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포상을 받을 때도 미국에 거주하면서 필요성이 없고 허례허식이라는 판단에 신청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당했던 수많은 위인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명이다. 오는 3월 1일, 삼일절을 맞아 일제의 총부리와 칼날에 희생당한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묵념을 함께 하며 그들을 기억하자”고 당부했다.
<김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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