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면 늘 생각나는 일이 있다. 수년전 멀리서 공부하던 아들이 처음 방학을 맞아 돌아오는 날이었다. 공항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아들이 머리를 깎지 않고,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 적이 놀랐다.
집에서 불편 없이 지내던 아이가 집 떠나 잘 해 낼지 많은 염려를 하였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저런 모습일까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지금도 아직 여러모로 갈 길이 먼 아이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하다. 올해도 첫 손녀를 선물로 받은 것을 비롯해 감사할 조건이 많고 지금까지 몇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곳까지 왔다는 진정한 고백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감사를 흔히 몸, 마음, 그리고 영혼의 보약이라고 하는데, 이 약을 많이 먹는 사람은 행복을 선물로 받는 것을 경험한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는 지혜로운 사람의 두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요, 둘째는 “언제든지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겸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감사와 겸손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감사하지 못하는 데는 “나는 이 정도 대우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 “나는 이 정도의 생활수준을 할 자격이 있다” 또는 “나에게는 이러한 몹쓸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 등의 잠재의식이 있다. 자기 자신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면, 그렇지 않은 현실에 감사는 불가능하다.
듣지도, 보지도, 그리고 말도 못하는 아이의 엄마가 있다. 그 엄마는 “나에게만은 이런 장애아이가 태어나면 안된다”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이 있었다며 그 굴레 때문에 자기는 불평만 하고 감사할 수 없었음을 깨달았노라고 고백한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명령이다. 손양원 목사가 사랑하는 두 아들을 공산당의 총알에 빼앗기고 나서도 감사의 조건을 열 가지나 적어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성경의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너무 무리한 요구 같아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정말 이것이 가능할까? 일이 뜻대로 성취 되었을 때, 혹은 원하는 대로 성취된다면 감사한다는 조건적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뜻대로 안될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다면 이것은 진정 감사요, 깊은 믿음의 소유자만 할 수 있는 감사이다.
실패, 불행한 일, 슬픈 일 등 역경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우리를 떠나지 않고 위로하시며, 끝내는 선을 이룬다는 확고한 믿음 위에 굳건히 선다면 그러한 삶이 가능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은 그러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감옥에서도, 굴속에 숨어 살면서도,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면서도 기쁨의 찬양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믿음을 갖춘 겸손한 인물들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큰 도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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