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미국대표 여자축구팀이 아일랜드 여자대표팀을 5-0으로 가볍게 누르고 런던올림픽 금메달 팀다운 저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미국 여자대표팀이 그저 그런 남자 프로팀과 경기를 벌였다면 아마도 5-0 이상으로 대패했을지 모른다. 근력과 스피드가 바탕인 스포츠 경기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당할 수 없다.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이미 1973년에 남자가 여자에게 ‘묵사발’이 됐다.
‘세기의 성대결’로 일컬어진 테니스 경기에서 빌리 진 킹이 바비 릭스를 3-0으로 꺾고 10만달러 상금을 챙겼다. 두 사람 모두 그랜드슬램 대회를 석권한 노장이지만 킹은 당시 30세, 릭스는 59세였다. 릭스는 55세 때 세계 톱 여자선수인 마가렛 코트를 2-0으로 제압했었다.
휴스턴의 애스트로돔 풋볼구장을 가득 메운 3만여 관중 앞에서, 그리고 지구촌 37개국에서 5,000여만명이 TV중계를 지켜보는 가운데, 릭스가 킹에게 참담하게 무릎을 꿇은 후 거의 40년이 흐르는 동안 여자는 스포츠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약진한 반면 남자는 릭스처럼 기력을 잃고 비실거렸다. 이젠 전통적 고유영역인 국방에서까지 여자에게 밀린다.
릭스의 패배가 상징한 남성의 퇴조는 그 무렵(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서명한 남녀교육평등법으로 급물살을 타게 됐다. 40년이 지난 지금 학사학위는 말할 것도 없고 석·박사 학위취득도 여자가 남자를 앞지른다. 초중고교 교사직은 물론 교육행정직도 이미 여자들이 거의 독점하고 있다. 변호사 등 전문직 자격취득도 여성이 절반(49%)을 차지한다.
여자들은 오랜 불모지였던 정치판에도 괄목할만하게 진출했다. 그 무렵(1974년)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이 세계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됐고, 영국의 마가렛 대처, 인도의 인디라 간디,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프랑스의 에디트 크레송 등 여걸총리들이 속속 세계사에 등장했다. 한국에서도 좀 늦었지만(2006~07) 한명숙이 사상 첫 여성 국무총리가 됐다.
지금 한국에선 여당인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19일 선거에서 첫 여성대통령이 될 것인지에 관심이 쏠려 있다. 박은 야권의 남자후보인 문재인을 겨냥해 ‘여성대통령’을 선거구호로 내세우며 의식적으로 성대결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40년 전 테니스게임에서 킹이 릭스를 박살냈듯이 정치게임에서도 자기가 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인 듯하다.
박은 원래 ‘여성후보’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6년 전 대선후보 경선 때 초반에 잘 나가다가 막판에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여성대통령의 국방·안보 문제 대처능력이 도마에 오르면서 결국 이명박에게 패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출산과 양육, 장바구니 살림 등 여성 본연의 경험이 없는 여자라거나, 심지어 “생식기만 여자”라는 지독한 악담을 들었다.
대통령후보로 여자가 적격이냐, 부적격이냐를 따지는 건 유치하다. 정치판에서의 성대결 논리는 구시대 발상이다. 지구촌엔 현직 여성대통령 3명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총리들이 국정을 맡고 있다. 미국에선 성대결보다 더 금기돼야할 인종대결을 극복하고 흑인대통령이 재선까지 됐다. 대통령후보의 자질은 성이나 인종이 아니라 리더십과 비전과 품성이다.
박 후보가 여자인 것은 ‘여성우위 시대’인 지금은 오히려 강점이다. 약점은 따로 있다. 아버지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정치이념 후광이다. 그녀는 5·16을 두둔했고, 독재정권 피해자들에게 마지못해 사과했다. 1972년 11월21일 유신헌법을 만들어 실질적 종신 대통령이 된 박정희의 친딸이 꼭 40년 후 대선에서 정책대결보다 성대결을 강조하는 게 안쓰럽다.
성대결에서 이긴 킹은 “내가 오늘 패했더라면 여자 테니스 경기뿐 아니라 모든 여성 스포츠가 50년은 뒷걸음질했을 것”이라며 “지금 내가 신바람 나는 것은 나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남자를 이겨서가 아니라 많은 여성들에게 테니스 경기의 진수를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약 박근혜 후보가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다면 어떤 말을 할런지 궁금하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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