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을 떠나오면서1974년 취업으로 남편은 사모아로 갔다 지사장으로 있는 친구의 강권으로, 그 친구가 건축하는 식당과, 어름창고의 십장으로 간 것이다. 남편의 친구는 교육의 천국인 미국에서, 아이들을 세계적인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이유와, 사모아에 있다가 미국본토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유혹의 말에 남편은 다니던 직장 미군부대에 사직서를 내고, l년 먼저 사모아로 떠났다. 남은 가족은 일 년 뒤에 남편 뒤 따라 사모아로 남편을 따라를 가게 되었다.
집을 팔고, 남편 따라 가려니, 집을 팔기가 쉽지 않았다. 살던 집은 12년 전에 달동네에 집을 사서 일 년을 살다가, 그 집을 헐고, 남편이 설계로 지은 집이다. 설계는 전문가에 맡기자, 여기는 달동네니, 아래로 내려가서, 집을 짓자 하며 다투기도 한 집이다. 좁은 면적과 도로가 없는 여건을 가진 가운데 지어진 빨간 벽돌집이다. 우리는 그 집에서 십년동안 불편하게 살았다. 집을 복덕방에 내어 놓으니, 집 보러 오는 사람마다 집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흔들고 갔다. 나이 지긋한 복덕방 할아버지가 보시더니, “누가 이집을 설계하였는지 앞길이 훤합니다.” 하였다.
나는 앞길이 훤하다는 복덕방의 말을 지금도 가끔 남편에게 써먹고 있다. 억지를 부리면 “또 앞길이 훤해 지려고 그러시오”라고 말하면 남편은 뒤통수를 긁으면서 겸연쩍어 하였다. 당시 69국 전화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집에 얹어서 그나마 헐값에 팔고 고국을 떠나 올 수가 있었다.
한국을 떠나오면서 그동안 우리가족의 삶의 무게가 묻어있는 구석구석을 그리움으로 쓰다듬어 보고, 좁게 만든 아이들의 놀이터를 돌아보고, 보일러로 만든 방을 개량했다가 비싼 연료로 사용하지 못하고, 연탄을 이층으로 들고 다녔던 훈훈한 고단함도 굿바이 하고, 좁은 마당에 짖어 대던 10년 된 개(쫑)를 이웃집에 주고 오자니, 그 집에서 사랑스러운 쫑을 잡아먹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발목을 잡았다.
김포 공항 하늘을 한 번 더 보고, 고국을 마음속에 새기려고 눈도장을 잔뜩 찍었다. 단 하나뿐인 언니의 통곡도 함께 가슴에 담았다. “형제라고는 단둘인데 언제 다시 보니”하고 울던 원망의 눈빛에 마음이 무너지고, 배웅 나온 친지들에게 울음 섞인 미소를 흘렸다. 아이들은 서로가 말은 없었으나 아마도 그들도 그 나름대로 한국을 가슴 속 깊게 새기었을 것이다.
하와이 공항서 일어난 일75년도 사모아에 전화를 하려면 전화통에 매달려서 다이 얄을 하루 종일 돌려야, 한 번 통화를 할까 말까 한 형편이 안 좋았다. 한국을 떠나기 10일 전부터 매일처럼,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남편과 통화를 못하였다. 처음 나가는 외국이고, 혼자서 다섯 살서 열네 살까지의 네 아이를 데리고 가자니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지, 상비약은 어떤 것으로 하는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계절이 가을인지, 여름인지, 겨울인지,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는지, 밤이고 낮이고 전화를 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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