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서 골목으로
저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 천상병(1930-1993) ‘주막에서’ 전문
한 잔 술로 흐려지는시인의 시야에 세상은 시인만큼이나 무방비한 것인가. 느리게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이 쓸쓸한 축복처럼 고요하다. 취기에 피어나는 환각. 주막 할머니의 등 뒤로고향의 산이 솟아오르고 철 아닌 눈이 펑펑 쏟아지고 성황당꼭대기에선 아이들이즐겁게 논다. 아름다운 폐인으로 한 생을살다간 천상병 시인의 몽롱한 눈에 비친순하디 순한 천국, 그가 환각 속에서 만나는 고향이 슬프다.
-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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