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창호 연설문에서 밝혀져, 서울보다 먼저 진출
도산 안창호(오른쪽에서 3번째) 선생이 1925년 시카고 방문시 장이욱(왼쪽에서 2번째로 추정)씨 등 일행과 함께 농장을 방문해 찍은 기념사진.
평양냉면은 1915년께 시카고 인근에 첫 선을 보였으며 이는 서울보다 5년 빨리 등장했다는 사실이 문헌으로 처음 밝혀졌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9일~1938년 3월10일) 선생이 1925년 시카고 한인들을 모아놓고 “10년 전 이곳을 지나갈 때에 장씨에게서 냉면을 대접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와보니 참 반갑습니다”라는 내용의 연설문이 최근 발견되면서 이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안창호 선생은 1924년 12월 상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와 이듬해인 1925년 덴버•시카고•필라델피아•뉴욕•뉴헤븐•보스톤•폴리우버•다뉴바•사우스벤•디트로이트•캔사스•와밍햄 등지의 한인 동포사회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애국애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안창호 선생이 언급한 장씨는 1912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뒤 아이오아주와 일리노이주 경계에 있는 더뷰크대학(University of Dubuque)에 유학 중이던 전 주미대사 장이욱(張利郁)씨로 추정되나 장이욱씨가 확실한지 여부는 추후 검증 과정을 남겨 두고 있다. 안창호 선생은 냉면을 아주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사법당국으로부터 4년형을 받고 경기도 경찰부에 유치되어 있을 때 냉면을 좋아하는 안창호 선생에게 간수가 냉면을 시켜 주었다는 일화와 역시 냉면을 좋아하는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면 냉면 두 그릇씩 비웠다고 전해진다.
한편 평양냉면은 평양이 근대적인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19세기 말에 접어들어 전문식당에서 팔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평양 대동문 앞에는 2층으로 된 냉면집이 있었고, 1920년대 들어 평양 시내 수십 곳에 냉면집들이 속속 들어서 냉면집 주인들은 평양면옥상조합을 설립했다. 이 평양냉면이 서울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로 알려졌다. 이때 문을 연 냉면집은 낙원동의 부벽루, 광교와 수표교 사이의 백양루 그리고 돈의동의 동양루가 전문점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로 미루어 냉면은 서울보다 시카고 등 미 중서부에서 먼저 등장한 것으로 추정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소설가 김랑운은 1926년 ‘동광(東光)’ 8집에 소설 ‘냉면’을 발표했다. 세계 경제 공황으로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신문 기자인 순호가 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8월 줄어든 월급봉투를 들고 집으로 향하다 종로 근처에서 돼지편육과 채를 썬 배쪽 그리고 노란 겨자가 수북이 얹힌 냉면 한 그릇을 먹는 과정을 묘사했다. 1930년대 들어 냉면은 배달 음식으로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고, 당시 유기그릇에 담긴 냉면 값은 15전이었다. 배달부에게 별도로 10전의 수고비를 얹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미루어 평양냉면은 평양면옥상조합이 설립된 1915년 이전에 누군가에 의해 이미 시카고에 진출했으며 이는 서울보다 진출 시기가 빨랐던 것이다. <서울=시카고 한국일보 김영복 한국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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