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 시에 소재한 T.C 윌리엄스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 학교에서 사귄 한인학생들 가운데 의사가 되고 싶어 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공부도 열심히 했고 주말이면 자기 아버지가 일하는 직장에서 밤새 경비 서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가족들 생활비에도 보태고 대학 학비로 저축도 했다. 나와는 학교 공부뿐 아니라 장래 포부 등에 대해서도 대화를 많이 나누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2학년 겨울방학쯤 되자 서로 진학할 대학도 대충 정해졌다. 우리 둘은 대학에 들어가기 바로 전 여름방학에 같이 고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흥분되는 일이었다. 나도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파트타임 일을 했다.
졸업식이 다가오고 비행기 표를 구입해야 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주저하는 것이었다. 확실한 설명 없이 그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만 했다. 나중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하자 그제야 사실을 털어 놓았다. 영주권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나가면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였다. 가슴이 아팠다. 그 동안 신분문제로 얼마나 불안했고 앞으로 또 언제까지 그럴까. 나는 어떤 위로의 말도 섣불리 건넬 수 없었다. 그 친구는 다행히 그 후 모든 가족이 영주권을 취득했고 자신의 포부대로 의사가 되었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공화당 대통령 경선 후보들 가운데 가장 지지율이 높다는 도널드 트럼프가 내세우는 이민정책을 들으면서 만약 내 친구가 트럼프 후보의 이민정책을 적용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의 가족은 모두 한국으로 추방되었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서 의사가 되기는커녕 그동안 벌어진 학업 진도 차이로 아마 고등학교 공부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해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도 직업을 구하기 어려워 가족의 생계 자체가 어려웠을 수 있다.
나는 17년째 페어팩스 카운티에서 교육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 동안 이민가정 학생들 관련 이슈에 대한 논의와 주민들의 반응을 접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유일한 이민자 출신 교육위원으로서 나는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불법체류자에 대한 얘기도 합법 이민자들과 엄격히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불법체류자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이유들이 합법 이민자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불법이민자들에게 직장을 빼앗긴다거나 그들 때문에 임금이 낮아진다는 논리는 합법이민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불법이민 학생들 때문에 추가로 소요된다는 공교육비나 복지비용 문제도 합법이민자들의 경우 역시 다를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미국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이민자들을 얘기할 때 불법, 합법 구분이 없을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 국경에 담 쌓기, 모든 불법체류자들 추방, 미국태생 불체자 자녀들의 시민권 불인정, 오바마 행정부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시행 중인 체류신분 미비 청소년 추방유예조치 (DACA) 취소 등이 지금까지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공표한 대표적인 이민정책이다. 그런데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트럼프 후보가 공화당 성향 유권자들 거의 1/4의 지지를 받는다. 또한 트럼프 후보의 이런 이민정책 상당부분에 동조하는 다른 공화당 후보들도 제법 된다고 한다.
우려스러운 모습이다.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당내 경선을 의식해 후보들이 내놓은 정책일지라도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가슴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결코 내가 민주당 소속이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나 자신 이민자로서 이러한 반이민 정책은 절대로 찬성할 수 없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