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월기간이란 게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대통령의 취임 후 대략 3개월에서 100일 가량 언론이 비판을 자제한다. 이 기간은 의회와 새 대통령 사이에도 있다. 아마 그 유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The Hundred Days’가 아닐까 싶다. 그대로 옮기면 백일이지만 역사 언어로는 ‘백일 의회’다. 새 지도자가 누리는 기간으로 관례화 했으나 역사적 배경은 위기 극복이었다.
1932년 대공황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미국은 새 대통령으로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민주당의 루스벨트를 선택한다. 루스벨트는 취임 첫해인 1933년 3월9일부터 6월16일까지 백일간의 특별의회를 소집, 불황타개를 위한 주요 법안을 입법화하는 데 성공한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 각 산업부문마다 공정경쟁 규약 내용이 담긴 전국산업부흥법 제정 등 그 유명한 뉴딜정책을 밀어 부쳤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상 야당인 공화당은 반대할 명분이 약했다. 뉴딜정책의 입안은 루스벨트가 구성한 전문가 그룹 브레인 트러스트가 맡았다.
이후 ‘백일 의회’는 허니문 또는 그레이스 피리어드 등으로 이름을 다양화하며 아예 새로 취임한 대통령과 반대당, 언론 사이에 협조하는 기간으로 당연시 되곤 했다. 배경에는 대통령 취임 직후가 가장 의욕이 넘칠 때고 그 의욕이 순수할 때 추진하는 바에 힘을 실어 주자는 의미가 깔려 있다. 야당이나 언론 입장에서도 시작부터 비판한다는 건 부담이다. 위기를 극복하고 단결하여 발전시켜 나가자는 대의에 어줍잖게 비판을 가하는 건 딴죽이나 훼방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한국서도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취임 후 백일이 가장 중요하다며 새로운 정책 입안과 추진에 속도를 붙이는 경우를 종종 봐 왔다. 밀월기간을 믿은 거다.
밀월기간의 논리는 새 대통령 뿐 아니라 어느 사회 어느 조직이든 새로운 리더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개혁하겠다는 공약 없이 선출되는 리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32대 시카고 한인회 진안순 회장은 이 기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임기를 시작하자 마자 바로 닥친 광복절 기념식 탓이다. 당시 언론들의 영화관 기념식 비판을 32대 한인회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모른다. 처음부터 밀리면 안 된다는 힘겨루기로 인식해 버텼을 수도 있고 행사 강행이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굳게 믿었을 수도 있다.
다행인 것은 진 회장을 비롯한 32대 한인회장단이 지난 주 언론사들을 방문해 향후 한인회 운영에 협조를 당부했다는 거다.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긴 지난 일은 분명 유감이다. 하지만 32대 한인회는 아직 시작 단계고 갈 길이 멀다. 원래 임기를 따지자면 7월 1일부터 라야 하지만 피선거권 관련 정관 문제로 선거 자체가 늦어지면서 진회장은 7월 하순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10월 말쯤이나 되어야 100일이다. 취임식도 정상적인 절차를 밟았던 때에 비해 한달 가량 늦어졌다.
지난 일요일 저녁 치러진 32대 진안순 회장의 취임식은 역대 한인회장 취임식 중 가장 규모가 큰 행사로 기록될 만큼 성대했다. 1,500명 수용 규모의 뱅큇룸이 좁아 보였다. 각급 기관단체장들, 일반 한인하객들, 기업체 관계자 등 시카고 한인사회 각계 각층 사람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주류 정치인들도 다수 참석해 축사를 건넸다. 물론 이곳 언론사 모두가 취재에 나섰다. ‘열린 한인회, 우리 한인회, 비전있는 한인회’가 되어 시카고 한인사회의 발전적 미래를 이끌어 나가라는 주문이자 기대의 반영이다.
진회장 스스로도 말했듯 첫 여성 한인회장의 상징적 의미도 각별하거니와 경선을 통해 당선된 한인회장은 무게가 남다르다. 선거와 취임식을 통해 이곳 한인들이 실어준 힘이 시카고 한인사회 전체의 활력으로 되돌려지길 바란다. 그날 밤 많은 이들이 목도했듯이 보름을 갓 지난 달이 노랗다 못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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