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다가온다. 민족 구성원 각자의 삶에 뿌리 깊은 상처를 남긴 민족상잔의 전쟁이었다. 역사란 상처의 기록인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고 기록되는 외상보다, 보이지 않고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는 내상은 더 클지도 모른다.
1960년대 말, 난생처음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 도쿄엘 가게 되었다. 첫 해외 출장이었다.
도착 다음 날 아침, 데리러 올 지사 직원을 호텔 현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 앞 대로는 강물 흐르듯 자동차로 빼곡했다. 소음도 만만치 않았다. 쩌렁쩌렁 요란스러운 확성기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빨강 깃발을 펄럭이며 트럭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마에 빨간 띠를 두른 사람이 트럭 위에서 마이크에 대고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트럭 몸통에는 빨강 글씨로 커다랗게 ‘일본 공산당’이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일본 공산당 선전 차량이었다.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좌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지나 않나 하는 의구심이 났기 때문이었다. ‘일본 공산당’이란 문구를 보고, 또 그들의 선전 방송을 듣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로 엮일지 모른다는 피해 의식이 작동했던 게 분명했다.
나는 대학 시절 3.15부정 선거 규탄 데모를 주도한 일로 경찰에 연행된 적이 있었다.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은 용공 분자로 분류돼 많은 불이익을 당 하던 시절이었다. 정권의 뜻을 따르는 것, 그것이 선이며 그 뜻에 반하는 것은 악이요 역(逆)이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간직하면서도 겉으로는 그 감정을 속여야만 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시대를 선택해서 살 수는 없다. 주어진 시대를 최선을 다해서 살뿐이었다. 나도 직장 일에만 열심을 다 했다. 운 좋게 여러 선진국에서 주재 근무하게 되었다. ‘수출 강국, 대한민국 만들기’에 휴일도 휴가도 반납했다.
그러던 1980년 늦은 봄, 스위스 취리히 공항 주차장에서 틀림없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신사와 마주쳤다. 말을 걸었다. “한국분이세요?” 고개를 돌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황급히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후진하는 그 차를 어이없이 바라보고만 있던 나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차는 북한 외교관 차량이었다.
순간 나는 20년 전 일본에서처럼 또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만 기가 찼다. ‘북한 외교관과 접선이라도 한 것처럼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지식인, 유학생과 교민 등 194명이 조작을 통해 연루됐던 1967년 ‘동백림 사건’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사실 지난 72년 동안 남과 북은 모두 동족에 대해 이타심이 아닌 적개심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도록 반목과 왜곡을 조장하였다. 두 정치 체제는 자신들의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이데올로기를 이용했고 그에 따라 남북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남북 양쪽의 권력층과 기득권층에게는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들에겐 통일보다는 이대로(분단)가 더 좋았다.
지난 4월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6월 북미 정상회담으로 형성되고 있는 한반도 화해 분위기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그러나 한민족 평화와 통일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동족을 두고 ‘종북 빨갱이’라고 저주를 퍼붓는 계층은 여전하다.
겨레의 아픔, 곧 상처의 역사는 진행형임이 분명하다. 나의 분단 트라우마도 여기에 연유된 것이리라. 아니 우리 한민족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나름대로 ‘남북 분단 트라우마’ 를 앓고 있는 환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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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운 인랜드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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