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반, 내 나이 넷쯤 되었을 게다. 어머니 따라서 안동 외가에 갔었다. 외할머니께서 외갓집 마당에 있던 앵두를 따주신 것을 들고 영주로 돌아간 것을 보면 5월말이나 6월초쯤인 것 같고. 자식들 중에 갓난쟁이는 두고 갈 수 없었으니 업고 가셨고, 나머지 자식 중에서는 그나마 말을 잘 듣는 나를 데리고 가기로 하신 모양이다. 하라면 하고 하지말라면 하지 않으니 데리고 가기에는 그나마 제일 나았으리라.
영주역에서 완행 열차를 타고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역에서 내린 후 상아동에 있는 외가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역 부근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상아동 입구에서 내린 후 걸어서 외가가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방법과, 역에서부터 외갓집까지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가는 방법. 버스를 타면 버스삯이 아깝고, 그냥 걸어가면 멀기도 하려니와 안막동의 상당히 가파른 도로를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이날은 안동역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안동역 바로 직전 역인 이하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이하역에서 상아동 외가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첫돌도 안된 딸을 등에 업고, 한 손에는 기저귀가방을 들고, 네 살배기 아들을 걸리고 그렇게 어머니는 땡볕 쬐는 길을 걸으셨다.
하… 네 살 아이에게 그 길은 얼마나 멀고, 또 날은 얼마나 더운지…
조금 가다가 어머니께 물었다.
“다왔나?”
어머니께서 대답하셨다.
“다왔다.”
조금 가다가 또 물었다.
“다왔나?”
돌아오는 대답.
“다왔다.”
얼마 못 가서 또 문답.
“다왔나?”
“다왔다.”
또.
“다왔나?”
“다왔다.”
그렇게 끊임없는 문답이 이어져도 외가가 있는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어머니 나이 서른 초반. 업고 들고 걸리면서 여름날 뙤약볕 아래에서 어머니는 그렇게 외가로 향하셨다.
그로부터 수 십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길은 ‘외가’로 가는 길이 아니라 ‘친정’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그랬다. 내게는 외가로 가는 길이지만, 어머니에게는 친정으로 가는 길이었다. 저 논은 아무것이네 논, 저 산소는 거시기네 할배 산소, 저 산모퉁이 돌면 머시기네 집. 익숙한 땅, 친숙한 모습. 친정어머니 친정아버지 계신 마을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을 터이니 그 더위가 어디 더위로 느껴졌을 것인가. 그 먼 거리가 멀게 느껴졌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다왔나?”라는 아들아이 질문의 답은 항상 “다왔다.”일 수밖에. 마음은 이미 친정집 마당에 들어섰는데 등에 업은 딸아이가 그 얼마나 무겁고, 치맛자락 붙잡고 따라오는 아들아이 발걸음은 또 얼마나 답답했을 것인가.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도 무척이나 성가셨을 것이다.
그 딸자식 오기를 기다리시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가신지 오래고 두어 해 전에는 어머니마저 가셨다. 가고 안계신 어머니 생각이 간절한 날이 가끔 있다. 이하역에서 상아동 외갓집까지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따라가던 그 여름날이 떠오르면 그 간절함은 극에 달하게 된다. 친정집을 향해 치달아 가던 어머니의 그 마음이 내 가슴에 전이되다 보면 혼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사내 나이 마흔이 넘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
김성식 스프링필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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